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기술
케빈 애슈턴 지음, 김하현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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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집에 라디오 있는 사람 손들어보라며 가정환경 조사하던 시절, 겨울 방학 그것도 밤이면 사촌들과 이불 속에 발을 집어넣고 이야기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 속에 주로 귀신이 등장하곤 했는데 오줌 마려우면 낭패보게 마련이었다. 귀신 나오는 변소가 대문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스토리텔러다. 우리는 언제나 스토리텔러였다. (p. 18)'

우리는 말을 함으로써 마음, 생각, 사물을 표현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케빈 애슈턴은 오히려 이야기가 우리에게 언어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생존하는 데 이야기를 전달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했고,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진화의 바퀴도 굴러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야기와 새로운 스토리텔링 수단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이 책에서 설명한다. 중요한 스토리텔링 수단이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를 전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 새로운 수단은 혁명을 일으켰다.

선사시대 모닥불을 피워놓고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했던 때를 시작으로 노래와 그림, 문자, 인쇄, 전기, 전자, 비트를 거치면서 모두가 모두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여덟 번의 대혁명을 다룬다. 그리고 책 마지막에서는 스토리텔링의 미래를 상상하고 그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저자의 생각을 제시한다.


요즘 음모론이 일상이 돼서인지 저자의 음모론 해석이 흥미로웠다. 우선 저자는 음모론은 이론이 아니라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음모론은 픽션의 한 장르이며 모든 픽션이 그렇듯이 진실의 씨앗에서 비롯된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 암살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텔레비전 속 장면은 익숙해 보이지만 뭔가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이다. 이야기와 삶 사이의 공간, 여기로부터 음모론, 아니 이야기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음모론은 정보를 선택적으로 이용하고 틀린 예측을 내놓으면서 이야기를 짜 맞춰 나간다.

'추측적 미스터리와 달리 이러한 이야기를 믿으려면 비판적 사고를 잠시 유예해야 한다. 사적 동기에서 비롯된 판단에 굴복하고, 사실 정보를 떠나 공상으로 진입해야 한다. 이 희한하고 기상천외한 생각을 믿고 싶다고 스스로 원해야 한다. (p. 319)'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 태어난 우리의 뇌는 음모론을 점점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느낀다. 그 이야기를 믿게 되고 계속되는 다음 음모론도 쉽게 믿는다.


예전처럼 옹기종기 모여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는 시대가 됐다. 스마트폰을 켜 메신저 앱으로 대화하고, 여러 SNS를 통해서 타인의 이야기 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다. 심지어 궁금한 것을 AI에 물어보고, 가슴 아픈 상처를 AI에게 털어놓고 위로받기까지 한다.

듣기 싫은 이야기는 듣지 않을 수 있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 AI라는 새로운 스토리텔링 수단이 가져온 혁명이다. 게다가 문해력과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까지 위협받고 있다.

'나는 일반적인 종합 교육을 밟는 동안 비판적 사고 능력을 키우는 정규 수업을 받은 적이 있는가? 수업에서 인식론이나 메타인지, 회의주의 같은 비판적 사고의 요소들을 명시적으로 다룬 적이 있는가? 인지 편향에 대해, 그것들을 인식하고 완화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는가?
아마 당신의 대답은 '아니오'일 가능성이 높다. (p. 378)'

이런 환경 탓에 우리에게 도달하는 이야기는 내가 관심을 가질만한 이야기와 나의 편향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야기가 진실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하기도 어렵다. 음모론처럼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새로운 스토리텔링 기술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이 다차원적이고 다감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저자는 예측한다.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도 상상 그 이상의 것,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듯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듯한 이야기들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분명한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를 보호할 유일한 방법으로 저자는 비판적 문해력을 제시한다. '우리는 절대 중립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p. 383)'이고 스스로에게 비판적 문해력을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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