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노은 옮김 / 다산초당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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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100년 7개월을 사셨다. 1922년 생이시니 일제강점기에서 태어나 광복 (광복 한 해 전에 첫딸이 태어났다.), 한국전쟁, 두 번의 군사쿠데타, 광주민주화운동,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뽑은 정부를 지켜보셨다. 호롱 불부터 스마트폰까지 다양한 과학기술도 경험하셨다.

틈나는 대로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려주셨지만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의 표정을 정확히 읽어내긴 어려웠다. 아버지께서는 그리 시대정신에 민감한 분이 아니셨다. 그러니 들려주는 이야기 대부분 당신께서 겪은 고생을 비롯한 개인과 밀착된 삶이었다.


<어제의 세계>는 스테판 츠바이크의 회고록이다. 아니, 옮긴이의 표현을 빌리면 '사라진 유럽에 대한 회고록'이다. 츠바이크가 오스트리아를 떠나 망명 중일 때 구상하고 집필했다. 그의 나이가 예순 살이 돼가던 때였다.

'내가 이야기하게 될 것은 사실 나의 운명이라기보다는,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그 어떤 세대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운명을 짊어졌던 독특한 우리 세대 전체 운명이다. (p. 13, 서문)'

츠바이크 성장기인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 츠바이크가 '안정의 황금기'라고 표현하는 그때는 어떤 변동도 허락하지 않는 잘 짜인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전쟁이나 혁명, 전복이 일어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청춘을 보냈고 인도, 미국과 같은 유럽 밖 나라를 여행하며 세계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강하고 부유하고 아름다운 유럽,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나아질 미래를 유럽인들은 확신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죄가 됐다. 어떤 징조들이 나타났음에도 충분히 경계하지 않았다. 서른두 살이 되던 해, 평탄하고 찬란한 세상이 츠바이크 앞에 펼쳐진 그 순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교육받고, 성장하며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안정과 창조적 이성의 세계를 단 한순간에, 마치 속이 텅 빈 질그릇을 산산조각 내듯 부숴버렸다. (p. 352)'

참호전을 겪은 후 맞이하게 된 인플레이션은 화폐를 산산조각 내고 물물교환하는 석기시대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되돌려보냈다. 그리고 또 하나, 인플레이션은 격분하고 증오에 찬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도록 만들었다.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십 년 동안 비교적 평온에 머물던 유럽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또다시 불길한 징조가 있었지만, 그 같은 일이 이 주일 이상 지속될 거라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역사의 법칙이 하나 있다. 시대를 결정짓는 거대한 움직임이 일어날 때, 역사는 동시대인들에게만큼은 그 시작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p. 585)'

공개적인 학대로 파렴치한 쾌감을 느끼고, 정신적인 고문, 교묘한 모욕이 나치에 의해 자행됐지만, 1938년 유럽의 양심은 침묵하거나 투덜거릴 뿐, 곧 잊고 용서해버렸다.

1939년 9월 1일, 츠바이크가 혼인 신고를 하려고 베스의 사무소를 찾아간 그날, 독일은 폴란드를 쳐들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을 벌어졌고 츠바이크는 국적을 잃은 떠돌이가 되어 망명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그리고 브라질에 망명 중이던 육십이란 나이의 츠바이크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고, 전쟁이 태평양으로 확대된 걸 보며 희망을 내려놓는다. 1942년 2월 22일 전쟁 끝을 3년 앞두고 아내 로테와 안타깝게도 음독자살을 한다.


회고록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대목은 나치가 벌인 유대인 학대다. 수백 년 만에 유대인을 다시 하나의 공동체 강요하는 나치에 의해 유대인들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그리고 반복되었던 공통성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바로 '추방'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신들과 함께 살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비난했지만, 그 죄를 속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은 거부했다. (pp. 693, 694)'


츠바이크는 기록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세계를 사로잡았던 정신적 상황과 혼란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위함이라고 말이다.

츠바이크의 회고록을 읽음으로써 역사책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그 시대의 표정을 주름 하나하나까지 볼 수 있었다. 표정 뒤편에 자리한 감정도 느낄 수 있었다. 전쟁과 망명을 경험해 망연자실한 츠바이크, 그는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일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100년이란 세월 속에 나의 아버지가 겪었던 참담했던 식민 생활과 전쟁의 역사, 그 시대를 전혀 모르는 내게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또다시 닥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츠바이크의 사라진 유럽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어제의 세계>는 다시 한번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되짚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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