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에서 본 거리 - 다섯손가락 이두헌 노래글
이두헌 지음 / 이은북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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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가슴에 꼭 껴안고 다니던 두꺼운 전공 서적의 표지를 훔쳐보며 학과를 알아냈다. 가방이 엄연히 있는데 왜 책은 꼭 가슴에 끼고 다녀야 했는지 모를 시절이었지만, (p. 24)'

여자라도 대학에 치마를 입고 다니지 않던 시절,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이두헌처럼 가슴에 껴안은 책을 보고 불문학과란 걸 알아냈다. 마침 집이 같은 인천이라서 운이 좋으면 전철에서 만날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수업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그 학생을 만났다. 쫓아갔다. 같은 역에서 내렸다. 기회란 생각에 다가가 말을 건넨다. 불행하게도 그 학생은 나란 존재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인지 날 보는 표정이... 가관이었다. 냅다 뛰어 도망가 버렸다.

그날이 수요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보다는 '빨간 원피스'가 더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든다.


'노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없다면, 듣는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노래를 만든 사람에게도 짧은 이야기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p. 9 프롤로그)'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이두헌의 노래 이야기는 나를 과거의 이곳저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어찌 이리 사연이 많을까? 그래서 그가 만든 노래도 많은가 보다. 노래마다 간직한 사연, 이두헌 정도는 아니지만 그 사연 하나하나마다 나의 사연도 떠올랐다.

이두헌이 <이층에서 본 거리>만큼이나 어두웠던 시대에 청춘을 보냈다.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데 대학 캠퍼스는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최루탄 터지는 광경을 도서관에서 창 너머로 내려다보며 갈등했었다.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자신의 회색 삶의 비겁함을 유언장에 남겨놓은 채, 어느 여학생이 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렸다는 뉴스를 들었다. 내 갈등이 비겁함이 부끄러워 군대로 도망쳤다.

'시위가 매일같이 벌어지던 대학 시절,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거리는 방관자였던 비겁한 내게 너무나 비참한 풍경이었다. 무자비하고 잔인했던 독재의 시절, 이층 창 어딘가에서 유인물이 뿌려지고, 곧이어 3층에서 또 뿌려졌다. 그렇게 높이를 바꿔가며 알리고 싶었던 진실이 길바닥에 나뒹굴던 시절이었다. (p. 77)' 청춘의 색깔이 회색인 시대를 이두헌과 함께 살았었다.

독재는 내 판단이 의미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풍기 문란으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던 시절이 그랬다. 어떤 것이 풍기 문란인지는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이 결정했다. <전자오락실에서>처럼 금지된 곡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음반은 사전 심의를 거쳤고 음반 마지막 트랙은 건전가요가 차지했다.

'떡볶이와 라면마저 어른들의 잣대에 따라 불온한 것이 되던 시대. 그 와중에 전자오락실은 참 애매한 공간이었다. 새로운 문물이 늘 그렇듯, 금지하려는 자와 금지당하는 자 사이에 아직 암묵적인 법령이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p. 82)' 결정권이 내게 없던 시절에 이두헌과 나는 같은 고민을 하며 지나왔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작은 누님은 교회 꽃꽂이를 도맡았다. 처음 누님이 다니던 꽃집 겸 꽃꽂이학원에 꽃을 가지러 가던 날이 기억난다. 서른 나이에 분위기 있는 여인을 꽃꽂이선생님으로 상상했던 탓인지 좀 설렜다. 펑퍼짐한 몸매의 아줌마가 나를 반겼다. 동생이냐며 <안개꽃> 꽃말을 알려줬다. '고운 마음'. 안개꽃의 꽃말이 많지만 난 '고운 마음' 하나만 기억한다.

'꽃집 주인이 장미 곁에 안개꽃을 끼워 팔기로 한 그 최초의 결심은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일까? (...) 우리는 안개꽃이 일약 스타가 된 시대를 건너왔다. 이유도 없이 안개꽃에 주목을 보내고, 그 가녀린 꽃송이에 찬사의 시를 읊던 이상한 세상이 잠시 도래했었다. 곁에서 조용히 분위기를 완성하는 조연 같은 꽃. 생긴 것답게 꽃말도 '순수'인, 감히 내가 판매량에 일조했다고 믿는 장미의 영원한 무수리. 내게 안개꽃은 그저 고작 그런 꽃이었다. (p. 215)' 안개꽃이 일약 스타가 된 시대도 이두헌과 같이 건너왔다.


이두헌은 에필로그에서 '다 말해 버렸다'고 고백한다. 더 할 말이 없는 건 아마 오늘뿐일 거라며... 각각의 사연 끝 QR에 담긴 이두헌의 노래와 함께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할 말을 다 해버렸다는 말을 듣고 나니... 난 이제야 할 말이 생각난다. 이두헌이 데려다 놓은 나의 과거가 또렷하게 생각나기 시작했다.

'"시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살아보니 세상엔 그냥 가슴만 아린 그리움이 많았다. (p.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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