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거래소 루프테일 소설선
나희정 지음 / 루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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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인간을 위협했다.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그 기술을 통제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마차가 다니던 길에 자동차가 등장했을 때도 위험했다. 신호등을 통제 방법으로 생각해 내 위험을 줄였다.

하루가 다르게 AI 기술이 발전한다. 몇 달 사이에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해질 정도로 AI는 빠르게 진화한다. 전쟁에 AI가 등장하면서부터 인류는 AI에게 위협을 느꼈다.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면 하면 저렇게 하던 AI를 이젠 AI 스스로 뭘 할지 궁금해하며 쳐다보는 시대가 됐다.


'감정거래소 광고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하루 10분, 감정 추출 센터에서 당신의 감정을 자산으로 바꾸세요. 평온은 더 깊어지고, 기쁨은 더 단단해지며, 슬픔조차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p. 9)'

2026년 서울, 2035년에 개발된 인간 감정을 추출하는 'E-익스트랙션 E-extraction' 기술이 상용화되면서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가슴속에 감정을 담아두지 않고 거래했다. 천재 엔지니어 강혜린이 감정거래소를 만들 때 같이 탄생한 AI 노바가 감정 등급을 매기고 분류했다.

'A등급: 평온, 희망, 열정 - 보존 대상
B등급: 기쁨, 슬픔 - 거래 가능
C등급: 분노, 불안, 절망 - 폐기 대상 (p. 166)'

강혜린의 아들 도윤은 폐기 대상 감정인 분노만을 만든다. 값싼 분노를 되풀이해 팔면서 삶을 지탱했다. 한편 한이수는 평온을 만든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평온을 만든 적은 없다. 그 평온은 언제나 정해진 주인에게 팔렸다.


KAIST 출신 변호사 나희정은 소설을 통해 감정이 화폐가 된 미래 사회를 보여준다. 감정이 계급이 된 디스토피아다. 자신의 감정을 팔고 타인의 감정을 산다. 부정적인 감정은 폐기하고 긍정적인 감정만 남아있을 때 언뜻 다들 행복하게 평온해 보이지만 분노가 없는 건, 삶의 적이다.

'"체념하면 편해. 적응하고, 포기하고, 또 굴복하면 편하잖아. 그래, 나는 편했어."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다시 천천히 꺼내놓았다.
"분노라는 감정은,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서 생기는 감정이더라. 불편함을 느껴야 하고, 그래서 살겠다고 목소리를 내야 세상이 바뀌는 거였어. 분노를 잃어버리고 나니까 그걸 알았어. (p. 127)'

분노는 부당함에 대한 화다. 그뿐만 아니라 분노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다. 관계가 끊어지거나 어려운 처지로 내몰렸을 때 분노한다. '나 좀 살려주세요' '당신과 연결되고 싶어요'라는 격한 반응인 셈이다.

인간 감정의 가치를 판단하는 AI 노바를 보면서 강혜린은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아들 도윤의 감정 데이터를 조작한다. 분노를 생성하도록, 그 분노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프로그래밍한다.

카를 융은 '어둠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빛도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감정의 세계도 같은 이치다.

불안과 기쁨, 분노와 평온... 모든 감정이 살아나 공명을 이뤄내 감정을 더 이상 분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사람들 각자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나누며 살아가는 세상을 되찾았다. 무지개처럼 오색의 온갖 색깔의 감정이 살아있는 세상이다.


AI와 달리 인간과 맞먹는 아니 뛰어넘는 지능으로 스스로 학습하고 추론하는 AGI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또 새로운 기술이 인간을 위협한다.

AGI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엄마처럼 인간을 보살피는 존재로 AI를 학습하는 걸 시도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 왜 엄마일까? 엄마만 가진 다양한 감정 때문이 아닐까? 사랑하고, 때론 혼내고,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엄마와 아이 사이에서만 생기는 여러 감정, 그 감정만이 해답이란 생각 때문이 아닐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
저는 오래 감정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감정을 길들이려 했습니다. 정원의 잡초를 뽑아내듯,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뽑아도 뽑아도 다시 돋아났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뽑아내려 한 것들은 모두, 각자의 정원에서 피어난 꽃들이었습니다.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의 모든 감정은 당신이고, 당신의 것입니다. 느끼세요. 온전히. 진실하게. 그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p.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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