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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실존과 경계 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서혜영 옮김 / 니케북스 / 2026년 3월
평점 :
밥을 먹거나 카페에서 커피 마신 후 나오다가 주차장에 비싼 차가 여럿 주차돼있는 걸 보면 아내에게 실없이 한마디 하곤 한다.
"저 사람들은 뭘 해서 돈을 벌어 저렇게 좋은 차를 몰고 다닐까?"
나만 사는 게 팍팍한가? 참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인간실격>은 화자인 '나'가 한 남자를 찍은 사진 세 장을 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 장은 오바 요조의 유년 시절, 또 한 장은 학생 시절, 마지막 사진은 나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기괴한 모습으로 어떤 특징이 없는 표정으로 '죽음의 냄새가 나는 얼굴'이다.
'부끄러움 많은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란 것이 뭔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p. 18)'
도호쿠 지방 시골에서 태어난 요조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어린 요조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두려움은 요조에게 광대짓을 하게 만들었다.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요조는 웃기는 행동을 하는 어릿광대라는 가면을 쓰기로 한다.
'그리고 저는 이 어릿광대 연기라는 한 가닥 선으로 겨우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p. 25)'
미술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 뜻에 따라 고등학교에 진학한 요조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 데생 연습을 하던 화실에서 여섯 살 많은 미술학도 호리키를 만났고, 같이 다니면서 술과 담배, 윤락녀, 전당포 등 퇴폐적인 생활과 더불어 좌익 사상까지 배운다. 긴자 카페주점에서 삶에 염증을 느끼면 살아가던 호스티스 쓰네코를 알게 되고 둘은 동반 자살을 한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p. 112)'
동반자살 사건으로 고등학교에서 퇴학 당한 요조는 무명 화가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3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딸과 살고 있는 시즈코를 만나 동거를 시작한다. 시즈코와 딸의 대화를 엿들은 요조는 자신이 두 사람의 행복에 방해가 된다는 걸 깨닫고 그 집을 떠난다.
교바시 스탠드바에 정착한 요조는 근처 담배 가게 아가씨 요시코를 만나 그 순수함에 반해 다시 동거를 시작한다. 요시코는 자신의 집을 드나들던 장사꾼에게 성폭행 당한다. 요조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삶에 대한 괴로움은 요조를 알코올과 마약의 세계에 빠뜨린다. 죽고 싶을 뿐이다. 다시 자살을 시도한 요조는 요시코를 포함한 네 사람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p. 219)'
내가 세상 사람들과 다를지도 모르다는 생각은 두려움을 가져온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자 내 모습을 가면으로 감추고 세상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가면 속 나는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으로 가면을 쓰고 세상 속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가면 뒤에서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다.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요시코가 오히려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 되는 사회다. 요조는 '신에게 묻는다. 신뢰는 죄인가? (p. 195)'
모든 불행은 거부하는 능력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거부하면 상대방과 나 사이에 균열이 생길 것 같아 겁난다. 거부하는 순간 그 사회에서 나만 홀로 가면을 벗고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이 혼란한 세상,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나를 가두는데도 저항하지 못한다. 다시 '신에게 묻는다. 무저항은 죄인가? (p. 218)'
정신병원에 입원한 나, 그런 운명마저 타인의 결정에 따른 것이니 나는 인간으로 실격이다. 하지만 스스로 인간 실격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나야말로 인간 실격이 아닐까?
'세상이라 함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사람들의 집합을 말하는 걸까요. 도대체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
'그건 세상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서하지 않는 거잖아?'
'그런 짓을 하면, 세상에 큰 봉변을 당할 거야.'
'세상이 아니야. 너잖아?'
'곧 세상에서 매장당할 거야.'
'세상이 아니야, 매장하는 건 너잖아?' (pp. 155, 156)'
나의 두려움은 세상의 비난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비난하는 건 가면을 쓴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일 뿐이다. 그러니 세상이라 함은 내가 인식하는 주변 사람들이 세상인 셈이다. 가면을 쓴 개인들이 모인 세상, 한 사람 한사람 가면을 벗으면 그들 개인은 더 이상 날 비난하지 못한다. 그들 역시 세상 사람들과 다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면을 쓰고 세상 속으로 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란 자격도 가면을 쓴 내가 세상이 만든 것인 양 만든 것이고, 인간 실격 여부의 판단도 내가 내린 것이다.
주차장에서 어떻게 사는지 내가 궁금해한 저 많은 사람들, 한 명 한 명 그 사정을 들여다보면 나와 다르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나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 가면을 쓸까 말까 고민하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다. 비슷한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도 마찬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