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사랑 - 에밀 졸라 단편선 북커스 클래식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BOOKERS(북커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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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있는 그대로 보려는 꺼려한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랬으면 좋겠다는 상상에 낭만을 더해 나를 보여주려고 한다. 일기 쓸 때도 '누가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허영과 위선을 조금 넣어 각색한 일기를 쓴다.

드라마든 영화든 못 사는 사람 이야기 보다 잘 사는 사람 이야기가 더 재밌는 것도 불편과 편함의 차이다. 정 못 사는 사람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다면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 그래야 누구나 불쾌해하지 않는다.


186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발표한 에밀 졸라의 콩트와 누벨 가운데 열 편을 모은 단편집 <독한 사랑>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낭만은 없고 사실적인 묘사만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가난, 배신, 탐욕 등 인간 감정의 밑바닥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아주 짧은 이야기, 콩트에 속하는 <광고의 피해자>에서 클로드는 신문과 광고를 인생의 길잡이로 여기며 살아간다. 광고 숏츠를 즐기고 알고리즘에 따라 소비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클로드에게서 겹쳐 보인다. <우리를 탈출한 맹수들>에서는 동물원을 탈출한 사자와 하이에나의 눈을 통해 인간의 잔인함과 호전성을 희화화한다.

<후작 부인의 어깨>와 <가난한 소녀들은 무슨 꿈을 꿀까>에서는 후작 부인과 매일 허기진 상태로 살아가는 소녀 사이의 틈이 얼마나 벌어져있는지를 알게 된다. 표제작 <독한 사랑>에서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지독한 사랑 때문에 여자의 남편을 살해하고 결혼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증오에 이어 의심과 비겁함이 찾아온다.

'어느 날 그들은 상대방의 물 잔에 독을 타는 것을 서로에게 들켰다. 그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자 서로를 힘껏 껴안았다.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 낸 두 사람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이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가 되었음을 인정했다. (pp. 218, 219 독한 사랑)'


콩트보다는 조금 긴 이야기, 누벨에 속하는 <낭타>의 주인공 낭타는 돈만 없을 뿐 보기 드문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마침내 플라비와 계약 결혼을 하며 돈을 거머쥐게 된 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다. 하지만 낭타는 가난한 시절 자살을 시도하려던 허름한 집에 다시 찾아가 권총 자살할 결심을 한다. 낭타를 허물어뜨린 건 다름 아닌 사랑의 정념, 그 하나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종 부인>에서 지방 귀족 아들은 네종 부인으로부터 '감정 교육'을 호되게 받는다. <수르디 부인>에서는 수르디 부인은 화가 남편인 페르니낭이 예술가로서 성공하는데 자신의 재능을 사용한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한계가 어디쯤인지 엿볼 수 있다.

<결혼의 방식>과 <죽음의 방식>에서 에밀 졸라는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귀족, 브르주아, 상인, 서민, 농민이라는 계급에 따라 결혼과 죽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결혼이란 얼마나 이상야릇한 제도인가! 인류를 남자와 여자, 두 진영으로 나누어 서로에게 맞서도록 무장시킨 뒤 "평화롭게 살라!"는 말과 함께 그들을 같이 살게 하다니!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남자들은 사랑할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자신을 알리지도 못한 채 결혼을 하는 실정이다. 이것이 작금의 결혼이 지닌 뚜렷한 두 가지 특징이다. (p. 227 결혼의 방식)'

'귀족'에게 결혼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데 필요한 절차일 뿐이다. '부르조아'는 살롱을 훌륭하게 이끌어 줄 여자가 필요해 결혼한다. '상인'은 가게를 열기 위해 결혼하고, '서민'만이 유일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 그러나 그 사랑도 가난을 넘어서진 못한다.

'귀족'은 죽음에 이르서도 귀족 다운 품위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 '브루주아'는 죽어가면서까지 아들들에게 돈을 도둑맞을까 봐 두려워한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날조차 가게 문을 닫았다는 사실은 '상인' 가족 자식들을 미치게 한다.

'서민'의 아들이 죽어 장례 치르는 날, 하늘도 무심해 날씨마저 우중충하고 땅을 질퍽하다. 성당에서 장례절차도 날림을 진행됐고, 구호품도 아이가 죽고 나서야 도착한다. 평생 땅을 일구며 '농민'으로 살았던 아버지 죽음에 임박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해야 근근이 먹고사는 농민 자식들은 아버지를 돌볼 시간이 없다. 농민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그냥 어제와 같은 일상이다.


두 가지 삶이 있다. 실제 삶과 욕망을 드러내고 싶은 상상의 삶이다. 욕망을 드러내며 살고 싶지만 현실에서는 어렵다. 잘 사는 사람은 격에 맞게 보여줘야만 할 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은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서 욕망을 감춘 채 살아간다.

이 단편집에서 에밀 졸라는 우리가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욕망을 탐구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들킨 기분이 들어서 불쾌하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이 아님을 알기에 불편하다. 치밀한 리얼리티, 외면하고 싶을 뿐이다. 내 속에 감춰진 욕망과 흡사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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