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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장하나 옮김 / 성림원북스 / 2025년 8월
평점 :
이직이나 사직을 결심하게 만드는 건 사람이다. 일이 힘든 건 참을 수 있어도 직장에서 사람이 힘들게 할 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직장 생활할 때 아래 직원을 못 살게 해 여럿 내보낸 내 또래가 있었다. 힘들어하는 직원들이 나에게 토로해서 실상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윗사람과 친하게 지내 진급도 빨라 의기양양한 상태라 어떤 충고도 먹히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나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무모함 탓에 어릴 때부터 손해만 보고 살아왔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2층에서 뛰어내렸다가 허리를 삐끗해 일주일쯤 제대로 걷지 못한 적이 있다. 누군가는 왜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이유는 없다. (p. 7, 첫 문장)'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속 주인공 '도련님'은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몰락한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의 나이 많은 하녀 기요(淸)와 함께 살고 있다. 기요만 도련님을 무턱대고 아낄뿐 가족 그 누구도 도련님을 '글러먹은 놈'이라며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
'기요는 가끔 아무도 없을 때면 부엌에서 "도련님은 성격이 참 좋아요" 하고 나를 칭찬하곤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p. 11)'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찍 죽자 형은 집을 팔아 '도련님'에게 600엔을 남기고 떠난다. 도련님은 안타깝지만 기요와 떨어져 공부를 마친 후 도쿄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코쿠 근처의 중학교 수학 선생님을 자리를 얻는다. 학교로 가기 전 도련님은 조카 집에서 지내는 기요를 찾아가 작별 인사를 나눈다.
부임한 학교에서 도련님은 우리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온갖 군상을 만난다. 학생들마저 젊은 선생을 놀려먹는다. 부조리한 조직 문화,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 손익에 의해 사라진 도덕 속에서 융통성 없는 도련님은 갈등을 겪으며 고립되기도 하지만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는다.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정의의 편에 선 다음 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떠난다.
'아, 기요 얘기하는 걸 깜빡했다. 나는 도쿄에 오자마자 살 집도 정하지 않고, 가방을 든 채 곧장 기요가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기요, 나 왔어!"
"아, 도련님, 이렇게 빨리 돌아와 주다니..."
기요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너무 기뻐서 다시는 시골로 돌아가지 않고, 도쿄에서 기요랑 같이 살겠다고 말했다. (p. 186)'
천방지축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을 흔히 '도련님'이라 부른다. 생각 없는 사람이라며 쯧쯧 혀를 차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도련님이라고 놀리는 사람들은 위선에 차 있다.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알아서 아부하며 때때로 부조리와 야합을 일삼는다. '저래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하나'라며 오히려 '도련님'을 걱정하기까지 한다.
약자인 아래 직원을 못살게 굴면서 윗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내 또래에게 '내 말을 듣겠어?'라는 지레 짐작으로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한 건 비겁한 행동이다. '도련님'은 이런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비겁함은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사람들의 행동이다.
때로 '도련님'은 소수이기에 왕따당할 각오도 해야 한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말이다. 그러니 '도련님'이 되기가 쉽지 않다. 용기가 필요하다. 다행히 소설 속 도련님에게는 유일하게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 '기요'가 있었다. 항상 도련님 편에 서는 기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도련님은 그런 기요를 믿고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지금 지난날은 생각해 보니 나는 정의의 편에 선 '도련님'도 아니었고,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바라며 찾아온 직원들이 기댈 수 있는 '기요'도 되지 못했다. 그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군상에 지나지 않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