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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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관람했다. 내 속에서 탄성이 터졌다. 아름다웠다. 환상 그 자체였다.

그때 내 옆에 앉은 발레를 전공하는 연인으로부터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은 프리마 발레리나 1인이 2역을 하며 푸에테 32회전을 아름답게 소화해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사귀는 여자와 발레 이야기를 하려면 쓰이는 용어와 웬만한 작품의 스토리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공부했다.


'진정한 예술가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그의 춤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p. 26)'

나탈리아 레오노바, 그녀는 무용수 가운데 가장 희귀한 점프 능력을 타고난 점퍼였다. 예술가는 만들어진다. 그런 면에서 나타샤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천재였기 때문이다. 천재는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난다.

나타샤는 전 세계 모든 발레학교 중 가장 섬세하고 우아하기로 정평이 난 상트페테스부르크 바가노바에 니나 베레지아와 합격한다. 그곳에서 소피아와 페료자를 만나 우정을 쌓으며 이들 넷에게는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모스크바 국제 콩쿠르에서 그랑프리로 선정된 나타샤는 볼쇼이 극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랑 사샤, 볼쇼이 발레단의 남자 수석 무용수 드미트리를 만난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샤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당수스 에투알, 최상위 수석 무용수 제안을 받고 사샤와 함께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나타샤는 <지젤> 공연을 앞두고 추락한다. 지젤이 젊은 귀족 알베르의 비밀을 알고 충격에 빠졌듯이 나타샤는 사샤와 드미트리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알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전거를 타고 개선문 로터리 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미끄러지는 무언가에 나타샤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두 개의 헤드라이트가 하나의 둥근 빛으로 합쳐지면서 도시 전체를 지우고 나를 집어삼키는 순간이다. 그렇게 나는 날개를 얻은 이카루스처럼 환히 웃으며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p. 464)'

사고로 은퇴한 지 2년 지나 나타샤는 다시 샹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정상에 있던 나타샤에게 상처를 줘 바닥으로 떨어뜨린 드미트리와 사샤가 있었다. 드미트리는 나타샤에게 지젤 역을 부탁하며 사샤와 함께, 사고로 못다 한 <지젤> 공연 마무리를 제안한다.

'"음. 첫째, 너를 보고 있으면 꼭 날 보는 것 같아. 두 번째 이유, 유감스럽게도 네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발레리나라서. 정당한 평판이지." 몸을 일으킨 그가 요새에 솟은 두 개의 탑처럼 길고 튼튼한 다리로 우뚝 선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아무에게도 절대 얘기하지 마. 나한테도 하지 말라고. 내일 런스루 리허설에서 보자." 이 말과 함께 드미트리는 홱 뒤돌아서 자리를 뜬다. (p. 490)'


한 인터뷰에서 김주혜 작가는 <밤새들의 도시>를 '예술가와 예술 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신은 나탈리아 레오노바에게 천재적인 점프 능력을 주었다. 그리고 대가를 요구했다. 버티다가 결국 신에게 사랑을 내주고 <지젤> 앞에서 추락했다.

나타샤에게 아직 신이 준 점프라는 날개가 꺾이지 않고 남아있었다. 날갯짓에 안간힘을 써 새들처럼 그의 집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글쎄, 아마 저기가 집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 세료자가 창문을 당겨서 닫으며 말했다.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건 아주 강렬한 본능이지. 죽음의 두려움보다도 더 강렬한." (p. 515)'

<지젤>에 향한 사랑은 포기할 수 없었다. 마지막 힘을 <지젤>과 함께 날아오르는 날갯짓에 쏟아부었다. 나탈리아 레오노바, '알리스 볼라트 프로프리스 Alis volat propriis (p. 518)' 자신의 날개로 날아올랐다. 나탈리아 레오노바, 그녀는 주어진 삶에 그녀의 '세계'를 창조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세계를...


그동안 낯설었던 발레 작품과 발레 용어를 읽다 보니 이십 대 막바지에 만났던 그녀가 떠올랐다. 희미했던 그녀가 다시 뚜렷해졌다. 그쪽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고등학생 시절 그녀는 주말마다 마산에서 서울로 레슨을 받으러 올라왔었다. 마침내 발레로 유명한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원까지 마쳤다. 그녀의 석사논문은 '발목 부상에 관한...' 것으로 기억한다.

들리는 소식으로는 그녀는 '예술과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반대로 사랑도 포기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예술과의 사랑도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슬펐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했을 텐테. 높이 날아올랐으면 좋았을 텐데. 신의 그녀에게 점프 능력을 주지 않아서일까? 그래서 예술가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힘겨웠을까?

'예술가와 예술 간의 사랑', 어쩌면 천재에게만 주어진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깐 천재가 아닌 우리는 예술 간의 사랑이 아닌 그냥 사랑만 했어야 했다. <밤새들의 도시>, 그 이야기 속에 담긴 발레 용어들이 날 다시 아릿하게 했다. 발레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시절, 발레만큼이나 환상적이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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