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을 부탁해 - 우리가 미처 몰랐던 화장실에 관한 43가지 놀라운 이야기들
구론산바몬드 지음, 루미 그림 / 홍림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보다 두 달 늦게 태어난 (싫었을 텐데 어릴 때부터 항상 오빠라고 불렀던) 사촌 누이동생이 풀어놓는 화장실 에피소드가 있다. 어릴 적 한 방에 모여서 밤늦도록 만화책도 보고 수수께끼 책 갖다 놓고 서로 문제를 내보곤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오빠(여섯 살 터울 나의 형)가 말을 건넸다고 한다. '너 오줌 안 마렵냐?' 대문 밖 뒷간에 가는 것이 무서워 안 마렵다고 하면 조금 있다가 또... 계속... 듣다 보면 오줌이 마려워졌단다.
"단단히 마음먹고 일어서면 오빠가 한 마디 했어."
'갔다 올 때 물 좀 떠와~'
"얼마나 얄밉던지... ㅋ"

밤에 화장실 갈 때면 챙길게 많았다. 우선 큰맘 먹어야 했고. 국방색 기역 자 플래시, 화장실 문 앞을 지킬 동생이 됐든 누구 한 사람. 그리고 '아직 거기 있지?'라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그때 뒷간은 빨간색, 파란색 휴지를 주는 귀신이 사는 곳이었다.


누구나 재밌는 화장실 이야기 하나쯤은 있다. <화장실을 부탁해>는 그런 화장실에 얽힌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화장실과 관련한 문화를 비롯해 문명사, 환경문제, 인권문제 그리고 화장실의 미래 기술까지... 흥미진진한 43가지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어느새 화장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안온한 배변이 있기까지의 지난한 역사가 거대한 인류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화장실은 배변하는 곳 이상의 그 무엇이 되어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p. 8)'

한때 종교적인 이유로 인간의 배설물을 불결하다 여겨 건물에 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왕을 비롯해 5,000명 이상이 머물던 베르사유 궁전조차 휴대용 변기를 사용했다.

29세에 요절한 전위 예술가는 자신의 배설물을 담은 깡통 90개를 만들어 '예술가의 똥'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팔았다. 현재 깡통의 가치는 3억이 넘는다고 한다.
'만초니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부를 과시하기 위해 무엇이든 사려 했던 예술품 수집가들에 대한 비판과 풍자였다. (p. 108)'

고대 로마에서는 오줌을 구강세정제로 사용하는 등 한때 오줌은 비누로, 주방 세제로, 염색제로 사용됐고 보양식이기도 했다.
'오줌을 더러운 것으로 취급했던 민족은 정작 더러운 삶을 살았고, 오줌의 가치를 알고 잘 활용했던 민족은 번성했다. (p. 146)'

나사에서 벌어진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화장실은 차별의 수단으로 이용된다. 유색인종 화장실은 800미터나 떨어진 다른 건물에 있다.


지난해 10월 광화문과 여의도 일대에서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동성 결혼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집회가 있던 무렵이었다. 딸아이는 화장실 출입을 문제 삼아 차별금지법 반대 주장을 펼쳤다. 딸아이는 성소수자와 함게 화장실 사용하는 걸 두려워했다. 성소수자의 인권도 남녀로 구분된 화장실 문 앞에서는 딸아이 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불쾌한 시선이 두려워 발길을 멈춘다.

미국을 비롯한 영국, 캐나다, 스웨덴 등 여러 나라에서 '모두의 화장실'을 도입해 겉으로 드러나는 성별로 화장실 이용 자격을 주는 규범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2022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대학 최초로 성공회대학교가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설치했고, 카이스트가 그 뒤를 이었다.

''성 중립 화장실'은 완전히 밀폐되고 독립된 공간에 성별, 장애 특성, 동반자 유무 등에 따른 편의시설을 구비해 놓은 형태다. 다시 말해 화장실의 남녀 구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성별 분리 화장실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성 중립 화장실을 하나 더 설치하는 것이다. (p. 203)'

이분법에 갇힌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인권 의식이 높아지면 '모두의 화장실'은 딸아이의 걱정을 없애주고 모두가 안전하게 화장실을 이용할 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수세식 변기를 만들어 화장실을 집안으로 들여놓았듯이, 획기적인 기술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화장실을 만들어 모든 문제를 해결할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화장실'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언제가 장애인 화장실 설치와 같은 절차를 밟아 상용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래야 우리 딸아이도 성소수자에 대한 생각이 바뀔 테니까 말이다. 제3의 성, 제4의 성도 존재하는 성적 정체성에 대한 포용도 가능해질 것이다.

화장실의 변화가 편향에서 포용으로 확장하는 정도를 가늠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의 화장실'은 곧 인권 확대의 과정인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