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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는 도끼다 -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는 지성의 문장들
김지수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1월
평점 :
'필사란 무엇일까요? 도끼질입니다. 장작을 쪼개듯 암벽을 찍어 오르듯, 오늘 내가 여기 살아 있음을 새기는 도끼질이지요. 흘러가는 언어를 붙잡아 내 인생의 적재적소에 꽂아 넣는 구체적 행위, 그게 바로 필사입니다. (프롤로그에서)'
나무처럼 두껍고 딱딱한 겉표지에 나무 무늬가 새겨져있다. 그 한가운데 멋지게 도끼질 한 자국이. '책은 도끼다'라고 말한 사람은 카프카였다고 한다. 김지수 기자가 2015년부터 2025년까지 진행해온 400만 자의 인터뷰 가운데 마음에 새기는 도끼질 같은 문장을 고루 가려 뽑았다.
편견은 옅어지고 수용의 넓음으로 가득한 이 시대 대표 어른들의 말, 높은 곳에서 바라본 풍경을 전하는 지성인들의 언어, 비범한 힘을 가진 탁월한 직업을 가진 장인들의 말, 오르는 삶에서 흐르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안식의 언어 마지막으로 현자들이 들려주는 행복에 대한 말이 이 책에 담겼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자판만 두드리고 눌렀지 펜을 잡고 종이에 한 글자씩 눌러쓴 지 오래돼 펜 끝이 종이를 지나가는 촉감의 기억이 아련하다. 당황스럽기까지 했던 건 손가락의 힘이 예전 같지 않아 글자 끝까지 힘을 주지 못해 글씨가 날렸다. 한때 글씨 잘 쓴다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지금 내 필체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을 가져다가 '뭐 이런 책이 있냐'는 듯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 아내 모습을 보고 같이 필사해 보자고 했다. 몇 장을 넘기더니 유튜브 '잘잘법'으로 알게 된, 아내가 좋아하는 김기석 목사님의 글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적어나갔다. 덩달아 나도 목사님의 글 하나를 필사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문장 하나만 고르라는 말에 아내가 고른 문장은 두 달여 동안 계엄 사태로 마음이 힘들어서 인지 박주영 부장 판사의 글 '그래야 악이 상처받습니다'를 골랐다.
'...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은
'잘못이 외부에 있다'는 걸 자각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정신 차리려면,
약하고 염치 있는 사람들이 씩씩하게 잘 살아야 해요.
그래야 악이 상처받습니다. (p. 24)'
심성이 고운 사람인데 악에 받쳐있는 듯해 마음 아프다.
언어의 도끼질할 글이 많지만 나도 고심 끝에 한 문장 골라봤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님의 글이다.
'... 40세, 50세가 지나면서
점점 앞날이 아니라 오늘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돼요.
그다음엔 순간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죠.
60세가 되면 그런 생각조차 안 해요.
70세엔 이 시간을
보람 있게 보내야겠다는 욕심이나 부담이 없어져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기 마음속으로는
세상을 보는 눈은 조금도 늙지 않았어요. (p. 68, 매일이 극복)'
칠십 대 후반에 들어선 정경화는 매 순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육십 대에도 마찬가지였다는 데, 난 아직 욕심으로 가득하니. 세상 보는 눈도 늙지 않았다는 그와 달리 난 지금까지 살아온 관성으로 여전히 세상을 보고 있다. 반성하는 의미로 이 글에 도끼질했다.
만년필, 볼펜, 연필까지... 종류별도 모아 놓고 필사해 봤다. 슥슥~ 펜이 지나갈 때 종이와 맞닿은 그 떨리는 느낌이 이 책 필사를 마칠 때쯤에 내 감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내가 필사하는 글도 어깨너머로 엿보며 그의 감각, 그의 감정이 남긴 여운을 느끼고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