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생명의 지문 - 생명, 존재의 시원, 그리고 역사에 감춰진 피 이야기
라인하르트 프리들.셜리 미하엘라 소일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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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축구 경기 전반전이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에 심장외과 의사 프리들은 전화를 받는다. 칼이 아직 가슴에 꽂혀 있는 부상자가 병원으로 오고 있다는 전화였다.

20대 중반의 남자 하미트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파랗고, 몸은 석고상처럼 굳어갔다. (...) 추위에 온몸을 떨었고 (...) 피는 산소를 운반할 뿐 아니라, 생명의 온기를 배달한다. 생명의 온기가 피와 함께 몸에서 빠져나갔고, 그것은 죽음을 향한... (p. 18)'


<피, 생명의 지문>은 인류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피의 서사시라고 할만한 책이다. 저자 라인하르트 프리들 박사는 수천 개의 심장을 다룬 심장외과 분야의 선구자로 심장에 칼이 깊숙이 꽂힌 채 응급실에 실려 온 하미트의 수술과 회복 과정, 그리고 그가 칼에 찔린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피에 얽힌 모든 것들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1부 '피'에서는 하미트처럼 외상을 당했을 때 피가 반응하는 응고, 면역, 치유 과정 등 의학 정보뿐 아니라 과학, 경제, 문화과 관련된 피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피는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을 관통하여 흐르며 연결해 준다. 10만 킬로미터나 되는 동맥, 정맥, 모세혈관을 흐른다. 피는 뼈에서 비롯되고 피가 없으면 뼈가 마르는 순환하는 인과관계다. 피를 대가로 치러지는 전쟁에서 피가 권력과 잔혹함, 탐욕으로 거래되는 블러드코인으로 변질되는 것을 본다. 아무 근거도 없이 피가 인종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피부와 상처가 아물었더라도 영혼의 상처로 남은 고통은 여전할 수 있다. 뇌나 심장이 만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관여하는 호르몬 옥시토신이 고통을 줄여준다. 트라우마는 피에 지문을 남긴다.

'폭력의 트라우마는 세대를 거쳐 계속 대물림된다. 트라우마를 가진 부모의 자녀들은 종종 신체적, 정서적 폭력 속에 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것을 자녀와 손자들에게 물려준다. 이것을 대물림된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p. 178, 179)'
명상, 신앙, 사랑, 희망이란 묘약으로 조각난 영혼이 온전해질 수 있다.

2부 '생명'에서는 피의 기능과 함께 스트레스, 공감과 같은 인간의 감정이 피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태초에 흐름이 있었다! (p. 245)'
피는 심장의 펌프질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동한다. 피의 본질은 움직임이고 그 흐름으로 순환이 시작된다. 피의 흐름이 없다면 사랑도 없다. 피는 입술을 붉게 물들여 매력을 발산하며 파트너를 유혹한다.

우리 몸은 탄소, 수소, 산소, 칼슘 등 약국에서도 구할 수 있는 화학재료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원자들이 상호 연결될 때, 죽은 물질에 불과한 것들이 스스로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고 유전자를 가진 기적과 같은 생명이 탄생한다. 호흡이 몸과 마음을 연결한다. 들숨은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숨결은 피를 타고 계속 전달된다. 호흡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세포에 활력을 준다. 우리 모두가 항상 하는 일 호흡, 첫 숨을 쉬웠던 순간과 마지막 숨을 쉬게 될 날과 시간, 그 사이가 우리의 삶이다.

'피는 생명이고, 죽음이고, 흐름이다. (p. 336)'


의료 여러 분야에서 적극적인 민영화 움직임이 눈에 띈다. 건보 재정이 마르면 민간 보험으로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이동하고, 병실 예약 특혜와 같은 차별화된 서비스가 더해지면 더더욱 민간 보험에 의존하게 될 것이며 의료 차별은 더욱 빠르게 가속화될 것이다.

'현대사회는 의료와 치유라는 공공복지를 환자의 질병에서 이익을 얻는 거대 기업에 넘겼다. 권력, 돈, 소유, 피에 대한 탐욕으로 찢긴 마음의 구멍을 물질적 재화, 풍요, 데이터가 메워 주리라 희망하는 사회다. (p. 262)'

피의 지문으로 우리 몸의 정보가 새겨진다는 글을 읽고 걱정이 앞섰다. 우리 피, 생명의 지문이 기업의 손아귀에 쥐어질 때, 우리 생명이 그들의 탐욕으로 이용될까 하는 걱정이다. 자본이 욕심을 채우는데 내 소중한 생명이 수단으로 쓰이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죽음 또한 그들의 영리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한다.

그래서 그 어떤 욕심으로도 오염되지 않고, 영혼의 상처마저 치유된 내 몸의 원소들이 내 생명이 다하는 날, 내 몸을 떠나 우주를 떠돌다가 다른 생명의 피의 흐름으로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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