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 (20주년 기념판 양장본)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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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가>는 영국의 헌책방 거리로 알려진 채링크로스가 84번지 마크스 서점 직원들과 뉴욕에 사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가 1949년부터 1969년까지 20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다. 편지로 책을 주문하고 청구서를 주고받으면서 서점 주인 프랭크 도엘과 작가 헬렌 한프는 조금씩 자신을 내보여준다.

'가엾은 프랭크, 제가 그분을 너무 못살게 굴죠. 늘 뭔가 트집을 잡아 가지고 호통을 쳐대니 말이에요. 그저 재미로 조금 놀리는 것뿐이에요. 그분이 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요. 저는 저 점잖은 영국인의 자제심에 구멍을 내보려고 애쓰는 중이랍니다. 그분한테 궤양이 생긴다면 아마 그건 제가 한 것이겠죠. (p. 28)'

배급제로 식료품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런던의 사정을 알게 된 헬렌은 식료품을 선물로 서점에 보낸다. 식료품을 나눠가지면서 서점 직원들 그리고 프랭크의 아내, 이웃집에 사는 볼턴 부인까지 헬렌과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서로 일상을 공유하고 따뜻한 선물까지 주고받으며 가까워진 서점 직원들과 프랭크의 가족들은 헬렌이 런던 마크스 서점을 방문하게 될 날만을 기다린다.

'서점 사람들이 나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보냈는지 아니? 아일랜드풍 리넨 식탁보야. 진한 상앗빛에 고풍스러운 나뭇잎과 꽃무늬를 손으로 수놓은 건데, 꽃은 송이마다 다른 빛깔로 아주 연한 색에서 아주 깊은 색까지 명암이 표현돼 있고. 이런 건 너도 본 적이 없을 거야. 물론 내가 고물상에서 산 접이식 탁자는 여지없이 이런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언제라도 물결치는 빅토리아풍 소매를 살짝 걷어올리고 우아한 팔놀림으로 상상 속의 그레고리풍 찻주전자로 차를 따르고픈 충동이 들 정도야. (p. 70)'


영화 <84번가의 연인>을 이 책보다 먼저 봤다. 1987년에 개봉한 영화로 헬렌 한프 역에 앤 밴크로포드, 앤서니 홉킨스가 프랭크 도엘 역을 007 시리즈의 M역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주디 덴치가 노라 도엘 역으로 등장했다. 책을 매개로 한 영화여서인지 뭔가 고급스러운 감동을 느꼈다. 특히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이 책에서는 헬렌이 프랭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마크스 서점에 끝내 가지 못하지만) 헬렌이 마침내 런던을 찾아가 문을 닫은 마크스 서점을 쓸쓸히 둘러보는 모습이었다. 그 여운이 오래갔다.

헬렌 한프는 희곡 작가로 닥치는 대로 글을 썼지만 한 편의 희곡도 무대에 올리지 못한 실패한 작가였다고 한다. 옮긴이에 따르면, 헬렌은 채링크로스가 84번지로부터 마지막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러고는 바로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챙겨 출판사로 갔다. 이를 계기로 헬렌은 유명 작가가 된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공연되고 있다고 한다.

책이 마크스 서점의 가족들과 헬렌 한프에게 특별한 만남을 만들어주었듯이 내게도 책이 뜻밖에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보여주기도 한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절대로 내 인생에 등장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헬렌이 프랭크와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듯 나는 SNS로 그렇게 한다. 아픔을 같이하고 기쁨을 나눠 받기도 한다.

이들과의 책 인연이 헬렌처럼 유명 작가로 만들어주진 않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즐거운 삶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직장 생활하며 알게 된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위로를 그들로부터 받았다. 살아가는 데 힘도 얻고 있다. 퇴직 후의 인생을 그들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헬렌이 마스크 서점의 가족을 생각했듯이 책으로 맺어진 책 친구들을 떠올렸다. 큰 신세를 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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