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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 박화성과 박서련의 ㅣ 소설, 잇다 6
박화성.박서련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10월
평점 :
근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함께 읽는 '소설, 잇다' 시리즈 여섯 번째는 60년 동안 활동한 2세대 작가 박화성과 역사, 판타지, SF, 청소년 문학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박서련 작가를 잇는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다. 박화성의 소설 세 편과 박서련의 소설과 에세이가 각각 한 편씩 실려있다.
박화성은 사회적, 역사적 약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높였으며 박력 있고 의기가 넘치는 글을 쓰며 자신을 여성작가로 분류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박서련 역시 소수자와 약자, 역사나 사회에서 배제된 여성의 목소리에 항상 주목하며 글을 쓰는 작가다.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에서 서동권은 하수도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책임자를 상대로 석 달이나 밀린 임금을 받아내려고 투쟁한다. 또한 동권은 부하린의 유물사관 책을 읽으며 동료들에게 계급적 초등 지식을 넣어 주려고 노력한다. 한편 동권은 이복 여동생의 친구인 용희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동권 자신처럼 가난한 노동자가 부잣집 딸인 용희를 사랑하는 것과 사회주의자의 길로 나서는 자신의 동지로서 용희는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용희! 나는 용희를 정말로 사랑하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사랑이 현재 우리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억제하는 때가 많소. 그러나 용희는 어쩐지 누가 아오?" (p. 54)'
(중략)
박서련의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는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를 다시 쓴 작품이다. 독서 동아리 회장 진은 총여학생회를 재건하기 위해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다. 림은 진과 비밀스러운 동성애 관계로 그의 선거를 적극 돕는다. 독서토론 책으로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를 정하면서 림은 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용희! 나는 용희를 정말로 사랑하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사랑이 현재 우리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억제하는 때가 많소.
우리의 사랑이 현재 우리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다. 우리의 사랑은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다.
정세에 합당한 연애란 무엇일까?
이러한 주제에 골몰하는 이상은 소모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p. 192)'
둘의 관계를 독서모임에 알리자는 림의 말에 진은 '여자 총학생회장을 본 적 없는 학교가 레즈비언 총학생회장은 괜찮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어. (p. 195)'라고 말한다.
박서련은 <하수도 공사>에서 계급과 이데올로기가 달라 '정세에 합당하지 않은' 동권과 용희의 관계를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에서 총여학생회의 재건을 꿈꾸는 진과 레즈비언 관계인 림으로 바꿔 놓았다. 림은 진에게서 '정세에 합당하지 않은 연애'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동권을 본다.
'그런 걸까? 언니는 동권이고 나는 용희인 걸까?
그러니까 언니는 나를 애인보다도 한 동지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동권이 정말로 용희를 동지라고 여겼다면, 동등한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존재라고 느꼈다면 어째서 용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을까? (p. 201)'
100년 전 여성의 온전한 삶을 가로막는 '정세에 합당하지 않은' 상황은 그 조건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여전하다.
'가부장적 위계 구조와 사회주의자로서의 분투가 긴밀히 공모하는 가운데 (p. 233, 해설)' 박화성은 남편 옥바라지를 하며 여성 가장으로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며 틈틈이 글을 썼다.
박서련은 박화성과 다른 여성작가의 삶을 살고 있을까?
'학력에 대해 말할 때는 '나왔다'라는 말의 모호함을 즐겨 악용한다. 나왔다고 말하면 졸업을 한 건지 자퇴를 한 건지 헷갈리니까.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퇴 사실을 숨기지는 않는다. 누가 묻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을 뿐이다. (p. 206, 박서련 에세이 <총화>)'
여성 작가 박서련 역시 누구의 애인, 누구의 아내, 학내 중앙 자치기구 단체장의 여자 친구, 노조 상근자의 아내로 살았다. 소설을 쓰는 것보다 소설이 기반한 사실에 대해 쓰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박서련은 고백한다.
여성 또는 여성 작가의 삶은 이러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사회를 향해, 박서련처럼 대학교 자퇴 사실, 이혼한 남편 이야기를 할 용기가 없어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는 핑계를 대는 건 아닐까? 편견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말이다. 누가? 가부장 제도가. 여성과 이데올로기를 논하는 것을 한가하다 여기며 자신은 뭔가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남자로 규정하는 자들이.
박화성과 박서련, 그리고 역사와 사회에서 배제된 채 살아온 여성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정세에 합당한 연애를 하고 있어요.
정세에 합하지 않는 연애 같은 건 세상에 없어요. (p. 202)'
그리고 비겁하게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라는 핑계를 더 이상 대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