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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아줌마 - 사노 요코 10주기 기념 작품집
사노 요코 지음, 엄혜숙 옮김 / 페이퍼스토리 / 2024년 6월
평점 :
일본의 에세이스트이자 그림책 작가인 사노 요코의 <언덕 위의 아줌마>는 사노 요코 10주기 기념 작품집으로 지금까지 발견한 미수록 작품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동화, 짧은 이야기, 사노 요코가 그린 복장 변천사, 에세이, 그가 쓴 세 편이 희곡 가운데 한 편, 마지막으로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와 지낸 이야기가 실려있다.
동화 <제멋대로 곰>의 주인공은 곰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잠자는 동물들을 깨우며 이것저것 참견하는 하는가 하면, 땅에 꽃을 심어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곰의 천방지축 행동이 마치 어린아이들의 행동과 흡사하다. <지금이나 내일이나 아까나 옛날이나>의 후미코는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 시인이란 뭔지, 같은 달걀인데 삶으면 왜 맛이 달라지는지... 엄마와 아빠에게 연신 '왜?'라는 질문을 쏟아놓는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아이들을 대신해 후미코가 질문하는 듯하다.
'짧은 이야기'의 초현실적이고 이상한 에피소드는 사노 요코의 삶도 이랬던 거 아닌가?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복장 변천사>는 사노 요코가 직접 쓴 글과 함께 그린 그림이 있는 작품이다.
'그때는 모두 순모 천이었다. 내 교복은 원숭이를 키우고 있는 바느질 가게에서 만들어서, 원숭이 냄새가 달라붙어, 3년 내내 냄새가 없어지지 않았다. (p. 116, 나의 복장 변천사 16살)'
표제작인 희곡 <언덕 위의 아줌마>는 판타지다. 아줌마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이까지 잃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만을 지닐 틈이 없다. 무지개다리를 건너지 못한 사람들의 감정까지 챙기느라 감정이 죽 끓듯 변한다. 그럴 때마다 마을에 비가 오기도 하고, 폭풍이나 홍수가 나기도 한다.
'괴물 이상입니다. '기분'입니다. 세상에 '기분'만큼 무서운 건 없습니다. 모든 날씨는 '기분'의 기분에 따르니까요. 아시겠어요? (p. 223)'
소방서 서장의 아들 루루 덕분에 그동안 아줌마가 만들지 못했던 무지개를 만들게 되고 슬픈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마침내 무지개다리를 건너간다. 이제야 비로소 아줌마의 감정만이 남았다.
'그러니까 나는 모두를 위해서 죽을 수가 없는 거야. 모두를 대신해서 울고 웃고 화내고 있는 거야. 내 안에 많은 사람들의 기분이 꽉 차 있는 거야. (p. 246)'
지금 내 기분은 누구의 기분일까? 내 기분일까? 가족 또는 친구, 동료, 이웃의 기분을 내가 모두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언덕 위의 아줌마처럼 말이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기분이라는 괴물이 내 모습은 아닐지. 그래서 정작 내 기분대로 살지 못하고 남의 기분의 노예가 돼서 살고 심지어 그 기분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폭풍우를 쏟아붓고 있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