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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없던 감각 - 보는 법을 배운 소년, 듣는 법을 배운 소녀 그리고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수전 배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4년 5월
평점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이 생각난다. 올리버 색스는 그 책에서 특정 신경이나 기능에 이상이 생겨 일상생활을 포기해야만 했던 환자들의 이야기 24편을 소개한다. 그 환자들이 겪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 여겨 상상해 보았지만 그 세상의 문턱을 한치도 넘지 못했다.
시각이나 청각을 가져본 적이 없던 사람이 그 감각을 회복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감각을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들도 회복 즉시 우리와 똑같이 보고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우리의 감각은 유아기부터 지각 기술로 터득해 발달시킨 것들이다.
'눈과 귀를 새롭게 얻는다 해도 그 소유자가 자신이 보고 듣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 그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면 '보기'나 '듣기'로 이어지지 않는다. (p. 26)'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고, 손을 움직여 다른 각도에서 손을 인식하고, 머리를 좌우로 돌리면서 보는 관점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지를 파악하고, 옹알이를 하면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학습한다. 만지고, 사물을 떨어뜨려보고, 맞부딪히며 실험하고, 사물의 모양과 특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한 결과 얻은 감각들인 것이다.
그러면 이런 실험과 탐색을 하는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고 새로운 감각을 찾은 이들은 어떤 상황을 경험하게 될까? 우리들이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세상 이야기를 수전 배리가 들려준다. 역시 이번에도 충격이었다.
이 책의 저자 수전 배리는 사시로 인해 세상을 평면으로만 보았다. 40대 중반이 돼서야 새로운 시훈련을 받고 입체시를 처음 경험했다. 3차원 세상을 처음 보는 순간 사물 사이의 공간이 있는 것이 놀라웠다.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았다고 한다.
'나는 리엄을 수술 5년 후인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처음 만났고, 조흐라는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받은 지 10년 후인 스물두 살 때 만났다. (...) 나는 그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듣고 그들이 영위하는 일상의 작은 부분을 공유했을 때 비로소 두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지각 세계를 재구축하고 재정렬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p. 29)'
수전 배리는 입체로 세상을 보게 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는 법을 배운 소년 리엄과 듣는 법을 배운 소녀 조흐라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며, 물리적, 사회적 세계에 맞추어 각자 지각 체계를 바꾸고 적응시킬 힘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쉰두 살에 각막 수술로 세상을 보게 된 SB는 처음엔 흥분과 호기심으로 즐거웠지만 수술을 받은 후 1년 반 동안 우울해지고 건강이 나빠져 사망했다. 어릴 때 청력을 잃은 비더만은 30년 후 인공와우를 이식받았다. 하지만 다시 소리를 경험하는 일은 그의 평정심을 잃게 만들었고 딱 죽고 싶은 기분을 들게 했다.
리엄과 조흐리는 어떻게 SB와 비더만이 겪은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을 비켜갈 수 있었을까?
'뭔가를 수월하게 하고 싶다면 먼저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p. 274)'
우리는 새로운 감각 정보가 들어오더라도 원래 갖고 있던 범주에 묶으며 식별 작업을 쉽게 할 수 있지만 리엄과 조흐리는 그렇지 않았다. 이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얻는다는 건 이미 가지고 있던 지각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건이다. 하지만 리엄과 조흐리가 잘해낸 건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거의 지각의 운동선수가 돼서 선수가 훈련하듯이 보고 듣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물론 주변의 헌신도 큰 역할을 했다.
<내게 없던 감각>를 통해서 내가 문턱도 넘지 못했던 세계를 얼핏이나마 볼 수 있었다. 당연시했던 감각 세계의 경이로움 또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적응력으로 나만의 감각 정보와 세계를 만들어가는지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