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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ㅣ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평점 :
<움직임>은 이십칠 년 전, 즉 작가가 이십 대 막바지일 때 쓴 스무 살 주인공 이경의 가족 이야기다. 어떤 소설을 쓸까 고민하던 중 조경란 작가가 문학적 주제로 삼은 건 '가족'이었다. 이 소설 덕분에 작가는 고단하고 불안했던 이십 대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가족이라는 주제는 제 문학의 시작이었고, 그 출발의 책이 바로 <움직임>입니다. (p. 7, 개정판 작가의 말)'
주인공 신이경('나')은 스무 살이 됐을 때 엄마를 잃었다. 유일한 가족을 잃은 '나'는 외할아버지를 따라 새로운 가족에게 간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은 할아버지, 여섯 살 많은 이모, 열두 살 많은 삼촌이다. 그들이 사는 곳은 목욕탕집 일 층으로 여섯 가구가 한 개의 공중 화장실을 이용한다.
'나에게 새 가족이 생겼다. 밥상을 차려놓고 식구들을 기다린다. 상 위에는 네 벌의 수저가 놓여 있다. 나는 혼자 밥을 먹고 아침이면 혼자 어두운 방 안에 남겨진다. (p. 13, 첫 문장)'
이모는 키가 몹시 작다. 잔뜩 일그러진 미간 주름은 엄마를 빼닮았다. 하루 종일 농협에서 돈을 세고, 퇴근 후 집에서 새벽녘까지 공부한다. '지긋지긋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모는 '나'를 부를 때 이경아, 라고 부르지 않고 꼭 성까지 붙여 신이경이라고 부른다.
삼촌은 늑막염에 걸렸고 등허리께 손가락만 한 물혹이 달려있다. 그래서 매일 한 움큼씩 알약을 털어 넣는다. '나'는 삼촌과 말을 섞은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삼촌과 함께 시멘트보다 모래를 더 많이 섞은 벽돌을 만든다. 이 벽돌로 지은 집이 금방 무너지리란 걸 둘도 안다. 할아버지와 삼촌은 엇갈려 들어와 집에서 마주칠 일이 없다.
외가 쪽 사람들은 말이 없는 편이다. 마치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 같다. 모두들 식성도 제각각이다.
'아무도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 누구의 배 속도 빌리지 않고 세상에 혼자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여전히 혼자다. (...) 이곳에서는 시간도 늘 완류로만 흐르고 있다.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38)'
삼촌에게 삼촌보다 두 살 더 많은 여자가 있다. 삼 층 안마시술소 안내원으로 삼촌을 비롯해 외가 식구들은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앞 방 남자는 우편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천애고아이거나 버려진 사람으로 '나'처럼 타지 사람임이 분명하다. 같은 처리란 생각에 '나'는 그 남자에게 관심이 많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쉰여덟 살(2023년)에 작고한 김미현 평론가는 이 소설의 작품 해설에서 불행은 우성優性이고 행복은 열성劣性이라고 말한다. 불행은 마치 혈액형처럼 유전된다. 그런 이유로 노력하지 않아도 불행해진다. 반면 행복은 노력해야만 하고 돌연변이같이 돌발적인 사고로만 발생한다.
'행복은 행복과 만나야만 행복이 되고, 불행은 행복을 만나도 불행이 된다. 그것이 우성인 불행의 운명이다. (p. 108, 작품 해설)'
하나 남은 엄마라는 가족을 잃어 불행한 '나'는 새로운 가족에 합류한다. 그 가족이 행복해도 불행이 행복을 만나 불행한 법인데, 불행하게도 그 가족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서로 무관심한 불행한 가족이다. 주인공 '나'도 외가 식구들 이름이 가물가물하고 외가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불러주는 이모마저 '나'가 남이라도 되는 듯 성까지 붙여 이름을 부른다.
게다가 이 가족을 보호해야 할 할아버지와 삼촌이란 벽은 그들이 모래를 많이 섞어 쉽게 부서지도록 만든 불량 벽돌로 쌓은 벽과 같다. 단단하지 못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나'가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앞 방 남자는 이모와 함께 떠나버렸다.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나'와 외가 식구들이 달가워하지 않던 삼촌의 여자는 삼촌의 아이를 갖게 되면서 삼촌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나'와 삼촌의 여자는 서로 이름을 불러주는 가족이 된다.
'내 이름은 신이경이에요. 나는 이모처럼 진저리 치는 시늉을 하며 뇌까린다. (...) 아가씬 내 이름 알고 있어요? (...)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조차 하다. 그녀는 안마시술소 안내원이나 아니면 이모가 불렀던 것처럼 그 여자, 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삼촌은 그녀를 어떻게 부를까. 내 이름은 양미순이에요, 양미순. 그녀가 후르륵 제 이름을 알려준다. (p. 101)'
불행이 우성이라서 지긋지긋해서 가족을 거부하고 떠나면 가족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불행한 곳에 남거나 찾아 들어온 사람이 가족이 된다. 머물러 있는 듯해 움직임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가족을 떠난 할아버지와 이모가 남긴 넓어진 공간에 '나'의 조카와 삼촌의 여자가 들어섰다.
새로운 가족은 이전의 가족과 다르다. 이제 서로 이름을 알고, 삼촌의 여자는 이모에게 부르듯 '나'에게 아가씨라고 부르지만 이모처럼 어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삼촌의 여자 뱃속에 있는 아기, 어쩌면 그 아기의 발가락은 할아버지나 삼촌의 뭉툭한 발가락이 아니라 그녀의 하얗고 기름기름한 발가락을 닮을 수도 있다. 불행한 피가 조금은 희석되어 돌연변이 행복이 가족에게 있을지도 모를 희망을 그 아이가 가지고 태어날지도 모른다.
'가족을 버리거나 떠나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가족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고 한계가 있다. (p. 121, 작품 해설)'
불행한 가족이란 이유로 그 가족을 없애버려야 할까? 그 집에 더 이상 행복이 없으니 모두 떠나버려야 할까? 아니, 그곳에 남아 행복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 불행이 우성이라서 지레 겁먹고 좌절해하거나 떠나서는 안된다. 불행의 벽 틈을 헤집어 행복의 빛이 스며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끊임없이 움직여 불행과 행복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집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도망 쳐봤자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단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 가려는 끊임없는 '움직임'이 있는 곳, 그곳이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