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 잔혹사>는 왜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는지를 다룬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의 일탈은 해적질, 노예 무역, 시신 도굴, 살인, 동물 학대, 윤리 위반, 스파이 활동, 심리적 고문, 증거 조작 등 다양하다.

왜 좋은 과학자가 나쁜 짓을 할까? 이들 과학자들은 평범한 범죄자와 어떻게 다를까? 또 자신의 죄를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할까?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 몰입하다 보니 윤리 문제나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는 것 정도는 무시하기도 한다. 과학은 항상 옳은 것이라는 함정에 빠져 과학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이유가 된다.

'에디슨의 팀은 교류의 위험성을 부각시키려는 노력으로 결국 개 44마리, 송아지 6마리, 말 2마리를 죽였다. 에디슨은 심지어 실험 대상으로 쓰려고 서커스 코끼리까지 수배했는데, 이 계획이 무위로 돌아가자 크게 실망했다. (...) 에디슨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남아 있었다. 직류를 살리려면 교류와 죽음 사이의 관계를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사람을 죽일 필요가 있었다. (p. 165)'

우리가 아는 발명왕 에디슨 맞다. 에디슨은 교류를 '사형 집행인의 전류 the executioner's current'라고 부르며 사형 집행에 사용할 최초의 전기의자를 만든다. 아무 고통 없이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켐러의 사형집행은 고통 속에서 처참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공중보건국 의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고결한 것으로 여겼다. 터스키기의 일부 남성들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은 당연하게 인정했지만, 대다수 일반 대중에게는 이 연구에서 얻은 지식이 혜택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피험자의 고통을 고결한 희생으로 포장했다. (p. 223)'

흑인 남성 400명을 대상으로 매독의 후기 단계 진행 과정을 연구했다. 공중보건국 의사들은 이 실험을 위해 불과 8일 만에 페니실린으로 매독 치료를 할 수 있었음에도 터스키기의 흑인 환자들을 방치해 매독균이 활개 치도록 방치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과학 지식을 발견하는 과정이 비윤리적이었다고 해서 그 데이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그것이 이미 희생된 사람들을 더 존중하는 것일까? 죽기 직전의 사람을 앞에 두고 내버려둬야 하나? 간단하지 않다.

게다가 윤리적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 역사학자들은 갈릴레이와 뉴턴, 베르누이, 돌턴, 멘델을 비롯해 많은 과학자가 오늘날의 번듯한 연구소에서 그랬더라면 모두 해고되고도 남았을 방식으로 실험 결과와 데이터를 조작했다고 지적한다.

'많은 사람은 훌륭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훌륭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인성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p. 5)'

새로운 과학적 돌파구에는 항상 새로운 윤리적 딜레마가 뒤따른다. 또한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과학의 힘은 커진다. 이를 감안하면 아인슈타인의 통찰과 같이 과학자들이 지성에만 의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과학의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은 인성뿐이다. 처음부터 윤리를 염두에 두도록 해 일이 시작되기 전에 성찰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