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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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어느 날 마르세유 작은 만에서 캠핑을 하던 생물학 교수 안느 퉁글레와 육아 전문가 아라셀라 카스텔라노는 세 남자에게 몇 시간 동안 강간당했다. 두 여자는 고소했고 세 남자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됐다. 그 당시엔 강간 당하고 고소할 만한 용기를 가진 여성이 드물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수치심을 짊어져야 하는 건 가해자가 아니라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협박을 받을 때 우리는 결코 죽음과 삶 사이에서 "선택" 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응책을 찾고, 전략을 펼치고, 속임수를 쓰고, 결심하고, 체념하지만, 그것이 동의는 아니다. (p. 120)'

남성우월주의적 장치는 두 여성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그 시간에 거기서 뭘 했는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저항하긴 했는지, 조금은 동의한 건 아닌지.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거부하고 저항했더라도 그건 그저 '지연되고 가장된 동의'라고. 여성도 원해 쾌락을 즐겼을 것이라고. 그래서 죽음으로 대항하지 않은 강간 당한 여성 대부분은 침묵을 선택한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이 책에서 수치심을 치밀하게 탐색한다. 장자크 루소, 발자크, 조지프 콘래드, 디디에 에리봉, 카뮈, 에밀 졸라, 장 주네, 존 M.구체, 장 라신, 코르네이유, 로스탕 등의 작품과 플라톤, 칸트, 미셀 푸코, 질 들뢰즈 등 철학자의 글을 동원한다.

그로는 우리가 살면서 죄의식보다 수치심을 훨씬 많이 경험하고, 수치심의 강요에 굴복해서 내린 결정이 죄의식에 의한 것보다 훨씬 많음을 알아차린다. 수치심으로 겪게 될 두려움은 영원한 죄의식과 죽음도 삼켜버린다. 수치심은 처벌보다, 범죄보다, 죽음보다도 두렵다.


수치심을 모르는 자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몰염치에 그치지 않고 수치심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기까지 한다. 여성의 성적 순결을 집단의 명예와 결부시켜 금지된 사랑을 한 여성에게 수치심을 전가한다. 디지털 증오를 가해 죽은 후까지도 수치심을 안겨준다.

가난한 사람에게 악하다는, 못생겼다는, 냄새난다는, 가치 없는 존재라는 수치심을 안긴다. 수준을 정해놓고 그 수준을 지키느라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가차 없이 수치를 준다. 집단으로 소수자를 수치스럽게 만들어 편을 가른다. 앞서 예를 들었듯 강간 그리고 근친상간의 희생자들에게 수치심을 심어주어 침묵하게 만든다.


안느 퉁글레와 아라셀라 카스텔라노를 강간한 가해자들에게 구타와 상해라는 죄목으로 판결하려는 법정에 지젤 알리미는 맞서 싸웠다. 그 결과 1980년 12월 강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제시해 광범위하게 범죄 회부를 허용하는 새로운 법률이 가결된다.

'안느 퉁글레는 이 사건이 있고 20년이 지나서 이렇게 선언한다. "1978년, 내 강간에 대한 소송이 처음으로 수치심의 진영을 바꿔놓았다." (p. 108)'

수치심은 저항할 능력이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수치심의 반전 명령은 이것이다.

'세 가지 중대한 진술이자 시대적 명령도 있다.
"더는 자신을 수치스러워하지 말라!"
이것은 수치심-슬픔에 맞서는 삶의 폭발이자 분노의 폭발이다. (...)
"수치심을 모르는 자들 같으니!"
이것은 도덕주의자, 교육학자, 심리교육자들이 내뱉는 분노의 외침이다. (...)
"수치심의 진영이 바뀌어야 한다!"
"수치심을 가져야 할 건 당신들이다!"
이것은 분노의 외침이다. 가학자, 강간범, 근친상간을 저지르는 자들을 겨냥하고, 파렴치한 정치인, 부패한 고용주, 저속한 백만장자를 겨냥하는 외침이다. (p. 12~14)'

마르크스는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라고 썼다. 수치심이 혁명적이려면 그것이 나를 향한 분노여야 한다. 그래야 그 수치심이 상상력으로 작동한다. 나는 하찮은 여자가 아니다. 가련한 남자가 아니다. 나는 경멸 받아야 할 대상도 아니다. 나는 가치 있다. 수치심에서 비롯된 상상력은 나의 정체성을 다시 그리고 만들어낸다. 연대의식을 창조한다.

'그리고 수치심은 한계를 느끼는 감정이기에 언제나 변화를 향한 부름이다. (p.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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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1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은 나부터 먼저, 남만 물고 뜯는 게 혁명이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