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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미선나무에서 아카시아까지 시가 된 꽃과 나무
김승희 외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1월
평점 :
'환상문학의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SF의 거장 브래드버리는 매일 시를 읽으라고 조언한다. 시가 스스로 코, 눈, 귀, 혀, 손을 계속 의식하게 만들어 '감각을 확장하고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어서 시를 '바람이 부는 날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위를 자유롭게 달려가는 말을 눈으로 읽듯' 읽을 것을 권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시를 읽을 때조차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라는 뜻이 담겼다.
시를 읽어보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는 꽃과 나무를 소재로 노래한 시선집이다. 김승희, 김소월, 김영랑 등 우리나라 시인을 비롯해 외국 시인까지 서른세 명의 시를 뽑아 엮었다. 이 시집의 표제로 삼은 '모든 슬픔을 사라진다'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미선나무의 꽃말이다.
김승희는 시 <미선나무에게>에서 미선나무를 이렇게 노래했다.
'이 봄에 나는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누구에게 못한 말을 누군가에게 하는 것처럼
1인분의 사랑의 말을 누군가에게 하려는 것이다
동백에게 못한 말을 매화에게
매화에게 못한 말을 생강나무에게
생강나무에게 못한 말을 산수유에게
산수유에게 못한 말을 산벚나무에게
앵두나무,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 철쭉에게
이 봄에 나는 누군가에게 해야 할 사랑의 고백을
어딘가에게 고백해야 한다
산수유가 피고 생강나무가 피고 미선나무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피고 철쭉이 피는...
(p. 15, <미선나무에게> 중에서)'
사랑의 말은 누군가에게 전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고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는 그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 감정이 아픔이든지, 기쁨이든지, 공허함이든지, 벅찬 마음이든지... 아님 슬픔이든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침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봄날에 꽃이 이어 피듯이 동백에게 못했다면 매화에게 사랑의 말을 전해야 하고, 생강나무에게, 산수유에게...미선나무에게... 전해야 한다. 이어서 피는 꽃과 나무가 있어 봄날이 계속되듯이 누군가에게는 말을 전해야 사랑이 되어 슬픔이 사라진다.
'밀양 덕천댁 할머니가 김말해 할머니가 세월호 유족에게 편지를 쓰듯이
또 위안부 할머니들이 세월호 유족에게 편지를 쓰고
......
5.18 엄마들이 4.16 엄마들에게 편지를 쓰듯이
분홍 미선, 상아 미선, 푸른 미선아
......
(p. 16, <미선나무에게> 중에서)'
연인을 떼어 놓으면 떼어 놓을수록 그들 사랑의 불꽃이 더 활활 타오르듯이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는다면 슬픔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을 전하도록, 편지를 쓰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슬픔은 사라진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깊은 슬픔이 있다. 충분히 애도할 수 없으니... 슬픔을 내놓을 수 없으니... 그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다. 꽃과 나무에 감각을 실어 노래한 서른세 명의 시는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킨다. 모든 감각을 끄집어내 이 시들을 읽는다면... 시의 감각들이 건네는 위로가 우리의 슬픔을... 어쩌면 사라지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