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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1월
평점 :
영화 <희랍인 조르바 (1964)>에서 사업이 쫄딱 망한 후, 앤서니 퀸과 주인공이 군무 데임베키코 춤을 추는 장면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영화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크레타행 배를 탈 요량으로 찾아간 피레에프스 항구에서 나는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p. 7, 첫 문장)'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 '나'는 크레타 섬으로 가 갈탄 광산을 빌려 막노동자와 어울려 지내기로 맘먹는다. 항구의 카페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 알렉시스 조르바를 운명처럼 만난다. 조르바에게 감독일을 맡기고 같이 지내면서 그의 지나온 일들을 듣게 된다.
조르바는 산투르라는 악기를 연주하며 그냥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에 옮기는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억압이나 구속에서 벗어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같은 위버멘쉬였다.
'그는 남자, 꽃 피는 나무, 심지어 찬물 한 잔을 보고도 이런 식으로 놀라며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한다. 모든 것을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듯이 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p. 78)'
갈탄 광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조르바는 케이블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설치한다. 하지만 케이블 설치 후 테스트 첫날, 시설이 박살 나버리면서 '나'는 빈털터리가 돼버린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조르바와 함께 춤추고 해방감을 맛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오랜만에 기쁨을 느낀다.
조르바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오직 조르바 자신만을 믿는다.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스스로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질서나 규범이 아닌 자신의 감각으로 모든 걸 결정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조르바의 삶을 이야기할 때 니체를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니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신과 천국, 지옥을 부정하고 같은 삶이 계속 반복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아모르파티(Amor Fati)다. 그리고 위버멘쉬. 가혹한 삶을 종교나 도덕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만든 가치로 극복하며 삶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조르바가 사는 방식이다.
'"안 해본 게 없지. 손발을 쓰는 일이든, 머리를 쓰는 일이든 다. 직업을 정하는 것 자체가 인생에 한계를 두는 걸세!" (p. 18)'
직업을 정해두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했다는 등등... 나는 조르바보다는 주인공인 '나'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처럼 조르바의 삶을 동경하게 된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런 것 만은 아니다. 자유로움도 좋지만 개인의 행복만을 우선시하는 삶과 나는 거리가 좀 멀다.
'"... '젊은이, 나는 내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한 줄 아는가? '저는 지금 당장 죽을 것처럼 사는뎁쇼' 둘 중에 누가 옳은가, 보스?"
그가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 없지?"
나는 침묵을 지켰다. 두 갈래 길이 똑같이 가파르고 험준할지라도 도착지는 같을 수 있다. 죽음을 부인하는 것, 그리고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 둘 다 결국 똑같지 않을까. 하지만 그때까지 나는 이 사실을 몰랐다. (p. 54)'
죽음을 앞에 둔다면 결국 어떤 삶이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조르바의 죽음을 대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 당당함 만큼은... 나의 죽음 매뉴얼로 삼고 싶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거칠게 밀쳐내고 침대에서 훌쩍 내려와 창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창틀을 잡고 먼 산을 내다보며 눈을 크게 뜬 채 웃음을 터뜨리다가 이내 말처럼 조용히 울었지요. 손톱으로 창틀을 그러쥐고 선 자세로 그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pp. 440, 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