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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양장본)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ㅣ Memory of Sentences Series 1
박예진 엮음, 버지니아 울프 원작 / 센텐스 / 2024년 1월
평점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
스물아홉의 나이 요절한 시인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다. 버지니아 울프를 처음 알게 된 건 이 시를 알고부터였다. 가녀린 모습, 뭔가 사연을 감춘 채 내 곁을 떠나가는 여인, 박인환의 시처럼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꼭 들어야만 할 것 같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는 잘 몰라도, 그녀는 남학생 마음의 한구석을 차지한 '구원久遠의 여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열세 편의 작품에서 꼽은 212개의 글을 만날 수 있다. 알다시피 모두 난해한 글이어서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북큐레이터 박예진의 작품 해석이 더없이 반갑다. 그 해석에 힘입어 버지니아 울프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그는 노년에는 끝없는 길이 있을 것이고, 어둠을 따라 뻗어 내려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하나의 문이 열리고 또 다른 문이 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갈래로 이어진 길에 노년을 비유하며 노년을 새로운 가능성의 시기로 시사함을 의미) (p. 183, 세월)'
'여성들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두 배로 확대하는 마법과 매혹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돋보기 역할로 남성의 모습을 비춰주었습니다. (p. 31,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차별로 받아들이는 남성 중심의 역사적 사회적 인식을 문제 삼았다. 만약에 셰익스피어에게 그와 견줄만한 재능을 가진 여동생이 있었다면? 그 동생도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명성이 뒤따랐을까? 결론은 '아니다'였다. 그래서 여성만의 서사를 글을 쓰기 위해서 여성에게 경제적 자유를 뜻하는 돈, 시공간적 자유를 뜻하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버지니아만의 새로운 소설 기법인 '의식의 흐름' 탄생은 남편 레너드 울프를 만남에서 비롯된다. 레너드는 버지니아가 자유롭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출판사를 차려 지원했다.
'벽에 있는 그 흔적은 조명 아래에서 보면 벽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며, 완전한 동그라미 모양은 아닙니다. (p. 73, 벽에 난 자국)'
버지니아는 글을 쓰는 방식에서도 이전 도구들을 거부했다. 비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시간과 공간의 흐릿한 경계 등이 그것이다. 나의 하루 중 의식하며 채우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생각이 머무는 곳은 예측불가하다. 우리도 그녀의 같은 의식의 흐름을 경험한다. 다만 글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버지니아의 글이 어렵다. 버지니아는 순간을 얇게 잘라놓아 작은 무늬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글로 옮겨 놓는다.
마침내 버지니아는 작품 속 주인공을 통해서 굳어진 자아와 정체성에서 벗어나 새롭게 탐구해 나간다. 삶에 집중하며 살았던 버지니아는 <막간>을 완성한 다음 1941년 3월 따뜻한 봄날 남편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우즈 강둑에서 '큼직한 돌멩이를 주워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곤 강물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P. 15)'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한 번쯤은 간단하지 않은 인생을 버지니아는 어떻게 펼쳐내고 있는지, 버지니아의 삶이 담긴 글을 통해 나를 비춰본다면 진정한 자유를 품게 될지도... 그리고 진정 나 자신을 찾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