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정의 세계 - 저울과 자를 든 인류의 숨겨진 역사
제임스 빈센트 지음, 장혜인 옮김 / 까치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물을 반 컵씩 두 번에 나눠 마신다. 화장실 앞에 놓인 체중계에 올라간다. 한 달 전부터 불어난 몸무게가 3킬로그램이나 된다. 다시 홈트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심한다. 오늘 날씨와 온도를 확인하고, 동작마다 시간을 재면서 스트레칭을 한다. 배고파서 밥을 먹는다기보다 정해진 시간에서 밥을 먹는다. 11시 30분에 아점을 먹는다. 타이머를 3분으로 맞추고 전자렌지에 밥을 데운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거리와 걸리는 시간을 미리 알아두었다가 출발한다. 하루에 12,000보 걷기로 했으니 그 기준으로 정해놓은 곳까지 걸어갔다가 턴한다. 오후 5시 30분, 저녁 먹을 시간이다. 밤 10시 30분이 되면 잠자리로 간다. 적어도 7시간 이상 자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으니 그럴려면 11시 정도엔 잠들어야 한다. 내 하루에 측정이 가득하다.

'내가 분명한 방식으로 측정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측정은 분명 나의 삶의 중심이며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측정을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사용한다. 나의 일상은 업무, 운동, 생산성의 일반적인 척도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p. 377, 나가며)'


<측정의 세계>는 저자 제임스 빈센트가 가진 측정 단위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책이다. 저울과 자를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과학, 수학과 어울려 측정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1장에서 4장까지 다룬다.

5장에서 8장까지는 측정과 사회의 관계를 살펴본다. 미터법 제정과 프랑스 혁명의 관계, 미국의 개척자들이 지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그린 역사, 통계의 엄청난 힘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미터법을 따르지 않는 영국과 미국식 척도의 배경을 설명한다. 그리고 9장에서는 표준값 정의의 의미 마지막으로 10장에서 현대사회에서 측정의 힘이 얼마나 큰 영향을 발휘하는지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일화가 역사를 재미있는 동화로 바꾼다.


'측정은 언어나 놀이처럼 인지의 초석이다. 우리는 측정으로 세계를 구분하는 방법에 관심을 두게 되고, 직선이 끝나거나 저울이 기울어지는 지점에 주목하게 된다. 측정은 현실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면서, 앞을 향한 발판을 놓는다. (p. 15)'

인류는 자기 몸을 가장 먼저 측정 도구로 삼았다. 손을 벌려 한뼘으로 가늠했고, 팔꿈치에서 손끝까지를 재서 큐빗이라고 이름붙였다. 측정해서 교환하고, 댓가를 지불한다. 내가 체중계에 올라가듯이 측정을 건강관리에 이용하기도 한다.

권력자는 통치를 정당화하는데 측정을 도구로 사용한다. 이럴 경우 측정은 권력에게 이득을 주었고 힘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학업 성취도를 측정해 줄 세우는 사용한다. 기업은 성과를 측정해 보상에 차등을 두어 지급한다. 측정된 숫자는 복잡해서 머리 아플만한 것들을 없애고 단순화해 한결 편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숫자는 결과를 주고, 문제를 "감정에 덜 흔들리게 만들면서도 지적으로 더욱 다루기 쉽게 해주기 때문이다." (p. 362)'


측정된 통계를 맹신해 진실로 취급할 때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삶과 죽음을 측정하는 우생학이 그것이다. 우생학자 헨리 고더드는 IQ가 낮은 사람을 바보, 천치, 멍청이로 분류했고 이를 변하지 않는 잠재력으로 여겨 이들에게서 모든 교육 기회를 박탈했다.

'고더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지능이 원래 그러하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환경이 좋아도 정신이 나약한 사람을 정상인으로 바꿀 수는 없다. 빨간 털 동물을 까만 털 동물로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 267)'

이러한 생각은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다. 우생학을 교리로 여겨 미국과 유럽에서 수십만명이 불임 수수을 받아야 했고, '살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간주된 사람들이 유럽 '청소'라는 명목하에 살해되었다. 캘리포니아 교도소에서는 비교적 최근인 2014년까지도 수백 명의 여성들이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았다.


이렇듯 측정에 명암이 존재한다면 무엇을 측정해야 할까? 아니 측정이 우리에게 필요하기나 한 걸까? 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소한 척도 하나를 소개한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제4악장 '환희의 송가'를 듣는 일이다. 인생에서 긍정적인 일이 일어나거나 주목할만한 성취를 했을때에만 들기로 결심했단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그런 행복을 느낄만한 일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당연히 환희의 송가를 듣지 못하게 됐다. 재미삼아 시작한 일이 저자를 구속하게 된 것이다.

글머리에 소개한 나의 하루에서 보다시피 나도 저자와 비슷한 자기측정 관계를 갖고있다. 그러한 하루가 건강에 도움이되고 짜임새있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틀 안에 자신을 가두기도 한다. 환희의 송가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주변에서 측정된 각종 숫자와 통계로 성취를 높일만한 방법을 조언한다. 폭력처럼 느낄정도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어온다. 생각해보자. 모든 가치를 측정할 수 있을까?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도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수천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측정할 수 없는 가치들을 재보라는 강요는 여전하다.

'오늘날 우리가 측정을 다루는 방식에는 여전히 이와 비슷한 마술적 사고가 남아 있다. 우리는 측정이 객관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숫자를 숭배하고, 삶의 모든 문제를 통계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는 한다. 그러나 때로 세상 속 어떤 것의 위치를 측정하면, 그 표시 자체가 더욱 힘을 얻고 측정 대상은 오히려 배경으로 물러나기도 한다. 계획이 목표를 삼켜버리고 애초에 원한 것은 보이지 않게 된다. 측정 위에 세워진 사회, 측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측정이 어떤 목표에 기여하는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p. 3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