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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가다 ㅣ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평점 :
'시간이 담긴 그릇...
잠든 엄마를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사람의 몸은 시간이 담긴 그릇 같다고.
그렇다면 엄마의 몸에는 칠십일 년이 담긴 셈이다. (p. 13, 첫 문장)'
어머니의 몸엔 육십구 년이, 아버지의 몸엔 백 년이 담겼었다. 어머니는 오열하며 친구같았던 큰 딸의 죽음을 견뎌내야 했었다. 아내를 이십구 년이나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는 큰 아들 그리고 동생 셋과 누님 한 분의 죽음에 눈물을 삼키며 힘든 삶을 달랬고 지난해 십이월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부모님의 그릇에 각각 담긴 육십구 년, 백 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기억이 닿는 곳까지 더듬어 갔다.
<겨울을 지나가다>는 작가정신의 '소설 향' 시리즈의 여덟 번째로 조해진의 중편 소설이다.
'언제나 그랬다. 조해진의 소설을 읽는 것은 언젠가 크게 발을 헛디뎌 무너져 내렸을 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힘을 비축해두는 일이고, 적대적인 얼굴을 하고 불쑥 나타난 타인 앞에 잠시 멈춰 그가 나쁜 건지 아픈 건지를 헤아려볼 수 있는 숨을 준비해두는 일이고, 미래로 함께 나아가야 할 이 시대의 가장 약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어두는 일이다. (p. 6, 김혼비)'
정연의 엄마는 정연의 동생 미연이 일곱 살 일 때 이혼했다. 남편이 다른 살림을 차린 후 기사식당에서 일하며 딸 둘을 키웠다. 미연이 대학 가던 해, 고향인 J읍에 내려와 칼국숫집을 하며 지내던 엄마는 췌장암 선고를 받는다. 생업과 아이들이 때문에 간병 도우미를 부르고 치료비 감당은 엄마의 사망 보험금으로 해결하기로 두 딸은 마음먹는다. 호전될 기미가 없자 치료를 포기하고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고, 그런 엄마를 정연은 일을 포기하고 두 달 남짓 곁에서 돌본다.
식당 딸린 집과 키우던 강아지 정미를 남긴 엄마의 임종을 정연은 마주한다.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미안함과 자신의 미래 걱정에 엄마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엄마를 잃은 슬픔으로 정연은 복잡하기만 하다. 정연은 엄마 집에 혼자 남아 며칠 지내기로 한다.
'존재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雨水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차에 도달할 터였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이번 겨울에 나는 그것을 배웠다. (p. 132)'
겨울의 문턱 동지冬至에 찾아온 엄마의 죽음, 대한大寒과도 같은 살을 에는 듯 깊은 슬픔, 이 모두를 견뎌내고 나면, 겨울을 끝내는 우수雨水가 찾아오듯 깊은 상처에 딱지가 생겨 아픔을 감싸게 마련이다. 정연이 엄마를 애도하는 동안 엄마와 관계 속에 남겨진 사람들, 미용실 혜란 아줌마, 노파를 비롯한 이웃들, 목공소 남자 영준이 찾아와 위로한다. 그리고 꼬리를 흔들며 집 밖으로 이끄는 정미가 정연을 일으켜 세운다.
'슬픔이 만들어지는 계절을 지나가면서, 슬픔으로 짜여졌지만 정작 그 슬픔이 결핍된 옷을 입은 채,
그리고 그 결핍이 이번 슬픔의 필연적인 정체성이란 걸 가까스로 깨달으며... (p.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