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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모텔
백은정 지음 / 달 / 2023년 9월
평점 :
갓 입사하고 한 달쯤 됐을 때였다. 늦게까지 일했고 겹친 술자리마저 길어져 집에 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여인숙에서 자기로 했다. 돈도 아껴야 해서 싼 곳을 찾았다. 처음이었고 지갑을 잃어버리니 잘 간수해야 한다는 등 좋지 않은 정보가 머릿속에 가득한 터라 지갑을 베개 밑에 두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밤새 술 취한 사람의 고함, 싸우는 소리, 걷어차는 소리, 부딪히는 소리, 방을 잘못 찾았는지 시도 때도 없이 방문을 두드리는 등 거의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당연히 내게 여인숙이나 모텔의 이미지는 좋지 않다. 뭔가 범죄가 일어나는 곳 같고 불륜의 현장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내가 사는 남양주에서 (주자창이 가려진) 한강뷰 모텔이 많으니 그런 생각이 더하다.
<아이 러브 모텔>은 객실 서른다섯 개 모텔을 남편과 7년째 운영하며 그곳에 머문 이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모아놓은 에세이다. 저자는 자신의 모텔에 책을 놓아 북텔로 만들었다. 이곳 모텔에 머물다 간 사람들이 '두 번째 우리 집'으로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도 모텔에 놓았다.
'버스를 타면 핸드폰 말고 창밖을 보는 사람, 밥은 굶어도 바다 보는 것은 포기 못하고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좋아해요. 아직도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어서 가끔 하늘을 봅니다. (책날개, 저자 소개 중에서)'
나는 버스를 타자마자 핸드폰을 본다. 바다? 그보다는 배고프면 못 참기에 밥을 더 챙긴다. 별똥별에 소원을 빈다고? 무슨 애도 아니고... 이런 나는 모텔에 드나드는 사람을 범죄자 또는 불륜으로 단정해 버리지만 저자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모텔 프런트에 앉아 들어오는 사람의 너머를 본다. 그것도 다정한 눈길로. 그의 삶을 단정하지 않고 여러 있을법한 삶을 그들에게 부여하며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내듯이 말이다.
아이와 같은 반 학부모로 만난 그녀는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야무지다 보니 공격적인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부딪혔다. 그래서 슬슬 거리를 두려던 차에 남편이 아닌 남자와 함께 그녀가 모텔로 들어왔다.
'구겨진 구석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곪은 것이 있다면 터뜨려야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뭐라고 그녀를 판단하나. 완벽하지 않기에 우리는 불완전에서 완전을 향해 흐르는 인간이 아니겠는가. (p. 84)'
친구 유희는 아름다운 모습을 물려받았다. 의사인 남편과 결혼했고 23년을 친구들의 부러움 속에 살았다. 다 가졌을 것 같았던 친구에게서 외로움을 보았다. 친구의 마음에 사랑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706호 키와 함께 사랑으로 빈자리가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도 건네준다.
'그녀에게 외로움은 보이지 않는 형용사가 아니라 한 발만 다가서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동사였다. (p. 96)'
수줍은 듯 나이 든 여자와 남자가 들어온다. '이 사람이 몸이 아파서 목욕시키려고요'라는 여자의 말에 욕조 있는 객실 키를 건네며 우리 쩡이 모텔 사장은 피곤했을 여자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공부와 집밖에 모르는 순둥이 정애는 국민학교도 못 나왔지만 큰 키에 멋진 매너와 말투, 철수의 잘 생긴 모습에 반해 결혼했다. 아이들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거들지 않는 철수를 견디며 정애는 묵묵히 살았다. 남편은 폐암 4기 판정을 받아 길어야 3개월이라는 시간을 남겨둔다. 마지막 서방 노릇을 하기 위해 모텔을 찾았으리라. 철수가 죽은 뒤 정애는 큰 아들을 불었다. 남편이 남긴 소 한 마리를 물려주며 아들에게 말한다.
'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갔노라는 말을 함께 전했다. 이제 막 결혼한 너에게 해줄 말은 그것뿐이라고. (p. 303)'
철수와 행복했던 기억을 남기려 몸부림치는 정애의 모습을 저자는 발견한다.
한쪽 다리를 저는 백발의 중년 남자와 30대 초반의 단아한 모습의 여자가 들어온다. 둘 다 무거워 보이는 화구를 어깨에 멨다.
다희는 어려서부터 그림이 실력이 뛰어났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려 했지만 고등학교 미술부의 텃세와 교칙으로 그 꿈을 접었다. 결혼 후 아이가 어느 정도 컸을 무렵, 문화센터 수채화 성인반을 알게 돼 수강했고, 거기서 수현의 코칭을 받는다. 물감과 종이 그리고 붓을 만나며 그동안 잠들었던 다희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수현은 다희의 종이 위에 멋진 무대를 만들어 주었고, 둘은 낯선 사랑의 감정도 갖게 된다.
'다희는 707호 키를 받아든 수현의 뒤를 따른다. '이 사랑'이라고 쓰고 '이 사람'이라고 고쳐서 되뇌면서. (p. 351)
추석 연휴에 쩡이 작가의 유쾌하고 따뜻한 마을을 읽을 수 있어 이번 한가위는 더 넉넉해졌다.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구를 정죄하는 차가움이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 제목처럼 다정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