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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6월
평점 :
'이 책은 그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p. 26)'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오펜하이머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 이후까지 방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역작이다.
오펜하이머는 1904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율리우스 오펜하이머는 독일계 유태인으로 자수성가했다. 덕분에 오펜하이머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 엘라는 화가로 율리우스를 만났을 무렵 미술을 가르쳤다. 엘라는 아들에게 집착해 오펜하이머는 어머니의 과잉보호 속에 자랐다.
오펜하이머 가족은 유태인임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유태교 회당에 나가지 않았다. '윤리문화협회'라는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인본주의를 강조하는 유태 신앙 조직에서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며 유태교 정통파인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이런 성장 환경으로 인해 유태인이란 걸 감추는 등 평생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오펜하이머는 "나는 매끈한, 기분 나쁠 정도로 착한 어린아이였다."라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 나는 세상이 잔인하고 냉엄한 곳이라는 사실에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 과잉보호하는 부모 밑에서 그는 "정상적이고 건전하게 나쁜 놈(bastard)이 될 방법"이 없었다. (p. 47)'
'오펜하이머가 1936년 봄 진 태트록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22세였다. (...) 진은 굵고 색이 짙은 곱슬머리, 갈색이 도는 푸른 눈동자, 짙고 검은 속눈썹, 그리고 자연스럽게 붉은 입술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p. 183)'
오펜하이머는 진의 아름다움과 수줍은듯한 우울한 분위기를 사랑했다. 진은 똑똑한 여성이었지만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었고 내성적이었다. 심리학을 전공해 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됐다. 둘은 두번이나 결혼할 뻔했지만 태트록이 거절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캐서린 '키티' 퓨닝 해리슨은 작은 몸집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다. 그녀는 진 만큼이나 아름다웠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p. 249)'
오펜하이머가 키티를 만났을 때, 키티는 이미 세 번의 결혼 경험이 있는 기혼자였다. 특히 두 번째 남편은 신념에 불타는 공산주의자였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 전사했다. 키티는 진과 다르게 외향적이었고 변덕스러웠으며 자기주장이 강했다. 둘은 평생 의존적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보살폈다.
오펜하이머와 키티 사이에는 아들 피터와 딸 토니 두 자녀가 있었다.
아들 피터는 엄마 키티와 약간의 불화가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방관하는 편이었다. 부모와 잘 지내지 못했던 피터는 두 번의 이혼을 겪었고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버지의 산장인 페로 칼리엔테에서 건축공이자 목수 일을 하며 생활했다. 핵 폐기물의 위험을 알리는 환경 운동가로도 활동한 피터는 아버지가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토니는 엄마 키티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가까운 친구도 드물었다. 두 번의 결혼에 실패했고, FBI에 뒷조사에 의해 자신이 선택한 직업조차 얻지 못하게 되자 결국 세인트존으로 돌아간다.
'1977년 1월 어느 일요일 오후에 그녀는 호크네스트 만에 오펜하이머가 지은 해변 오두막집에서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다. 그녀의 자살은 분명히 계획적인 것이었다. 토니는 자신의 침대에 1만 달러짜리 채권과 집을 "세인트존 주민들"에게 넘긴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p. 894)'
서른두 살이었다. 섬주민들은 토니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몰랐다.
예상이 빗나가는 법은 없었다. 왜 예술가, 독립운동가 등 삶을 희생한 과학자의 가족사는 비극적이어야만 하는가? 피터와 토니의 삶으로 투영된 치밀한 논리의 물리학자이자 뛰어난 리더십을 보인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모습은 당황과 난처함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는 원자 폭탄을 만들기 위한 독일과의 경주를 이끌어 나갈 완벽한 콤비였다. 오펜하이머의 스타일인 카리스마적 권위가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적절했다면, 그로브스는 위협함으로써 권위를 행사했다. (p. 350)'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기에는 흠이 있었다. 공산주의자라는 의혹, 노벨상을 받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행정 경험이 전혀 없었다. 세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로브스는 성과를 종합하고 핵심을 연결해 통찰하는 뛰어난 능력이 오펜하이머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총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네 살이었다. 그로브스의 예상대로 오펜하이머는 프로젝트를 통해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의 면모를 갖춘다.
트리니티(Trinity) 핵실험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이미 히틀러가 자살했고 독일은 항복해 폭탄을 나치스에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렇지만 일본에는 가능했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일본은 좀더 유리한 조건에서 항복하기 위해 소련과 접촉했고, 미국은 소련이 참여했을 때 벌어질 일본의 복잡한 상황이 싫었다. 무조건 항복을 위해 미국은 소련이 개입하기 전, 8월에 전쟁을 끝내길 원했다.
'1945년 8월 6일, 정확히 오전 8시 14분에 조종사 폴 티벳 (Paul Tibbet)의 어머니 이름을 따 에놀라 게이(Enola Gay)라는 별명을 붙인 B-29기가 시험해 보지 않은 총구식 우라늄 폭탄을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했다. (pp. 479, 480)'
1940~50년대를 휩쓸었던 건 매카시즘이었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미국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다. 이 스캔들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지만 의원과 대통령도 몸을 사릴 정도였다.
19030년대 미국에서 좌파 활동은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이때 매카시즘은 좌파적 경험을 갖고 있던 지식인들, 과학자들을 겨냥했다. 그중 한 명인 오펜하이머도 스트라우스의 안테나에 걸려들었다. 그는 수소폭탄 프로젝트를 의도적으로 방해했고, 공산주의자이며, 소련의 스파이라는 사실을 고발장에 담아 오펜하이머를 청문회장으로 끌어냈다.
진보적인 신념을 갖고 교원노조 참여, 스페인 내전 공화파 지원 등 공산당 쪽과 교류한 사실은 있으나 오펜하이머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다는 어떤 증거도 청문회에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레이 위원회는 그를 위험인물로 판단했고 비밀 취가 인가를 되돌려 주지 않았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청문회 이후 많은 과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오펜하이머의 무고를 주장했다. 유태인, 배신행위 혐의라는 공통점을 가진 드레퓌스 대위가 소환됐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로만 알려졌던 그는 이제 갈릴레오처럼 박해받는 과학자로도 유명세를 얻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간에 전해준 대가로 평생 독수리가 간을 쪼아먹어 고통을 받는 형벌을 받는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의 이점과 위험을 동시에 주었듯이 오펜하이머 역시 핵에너지를 이용하는 혜택과 함께 핵폭탄이라는 커다란 근심도 인류에게 안겨주었다.
'인류가 이제 스스로를 멸망시킬 능력을 갖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오펜하이머는 "그렇게까지는 아닙니다. 그렇게까지는. 물론 인간 전체의 상당수를 파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남은 자들을 과연 인류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이라고 대답했다. (p. 842)'
20세기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면서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오펜하이머의 삶은 급변하는 상황을 겪으면서 이렇듯 모순이 가득했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딜레마가 충돌하는 자신의 삶을 묘사하면서 오펜하이머는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말한다. 힘이 없다면 책임감도 있을 수 없다. 힘은 스스로 하는 행동에 대해서만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이 있다면, 부가 있다면 책임감을 가지는 범위는 넓어질 수밖에 없다.
지식과 부를 가졌던 오펜하이머의 삶은 올바른 행동이었을까? 그 행동으로 얻은 힘을, 그 힘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감을 기꺼이 짊어진 삶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