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의 사람 - 어느 소설가의 택배일지
정혁용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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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제대했을 때보다 세상이 만만해 보인 적은 없었다. 게다가 병장 시절엔 운동도 좀 해놓은 터라 힘쓰는 것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큰돈 좀 벌어보겠다고 선택한 아르바이트가 신축 아파트 단지에 나무를 심어 경치를 꾸미는 일이었다. 산에서 나무 좀 캐다가 화단에 심는 일이라기에 선뜻 나섰다.

일주일 일하고 앓아누웠다. 요령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일 자체가 고되었다. 우선 산을 오른다. 뿌리째 나무를 캐야 하는 데 삽질 반경이 장난 아니었다. 뿌리 흙까지 새끼줄로 묶고는 그 큰 나무를 들고 산을 내려와야 한다. 차에 나무를 싣고 아파트 현장으로 다시 와서 그 나무를 심기 위해 산에서 삽질 한 넓이와 깊이만큼 또 삽질을 해야 했다. 육체적 고통보다 머리를 쓰는 정신적 고통이 더하다고 운운하는 거? 헛소리다.

직장 생활하면서 육체적 고통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 못지않은 고통을 경험했다. 바로 인적 서비스로 겪는 감정 노동이다. 사람 상대하는 일, 정말 어렵다. 어쩌면 감정노동이 육체노동보다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여러 직업을 거쳐 좌절의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난 게 택배였다. 육체노동은 처음인데다 강도도 커서 매일 체력의 한계치를 넘나들었다. 하지만 정말 견딜 수 없었던 건 내 시간이 전혀 없다는 거였다. 항상 밖에 있는데 하늘을 볼 시간도 바람을 느낄 시간도 없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쓰러져 자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것도 서너 시간 말이다. (pp. 13, 14)'

택배는 육체적 고통에 감정노동을 더한 노동이란 생각이 든다. '어느 소설가의 택배일지'라는 부제의 에세이 <문밖의 사람>의 저자 정혁용 작가는 낮에는 택배 일을 하고, 틈틈이 휴대전화로 글을 쓰는 작가이자 택배 노동자다. 그는 내가 잠시나마 체험했던 육체적, 감정 노동에 따르는 고통의 최고봉인 택배를 하면서 장편소설 <침입자들>과 <파괴자들>을 출간했다.


'아무튼 성장이든 변화든 인간은 머리로도 할 수 있지만 거기에 육체적 단련이 동반되면 시너지 효과가 크게 나타나는 것 같다.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게 된다. 물론 이건 결론적인 얘기고 그 사이에 수많은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부정, 분노, 인정, 수용, 일상의 여러 과정 말이다. (p. 19)'

이런 삶을 대할 때 나의 인생은 한없이 작아진다. 부정하고 분노할 자격이 나에게 있을까? 적어도 저자의 삶 정도는 돼야 그런 자격이 있지 않을까? 사회에 대한 나의 분노는 그저 나의 부끄러운 삶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한 성숙하지 못한 부정이요 분노였다.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 아니냐고? 천만에 저자의 삶 앞에서 그런 소린 사치다. 쇼펜하우어의 말에 빗대어 저자 자신이 당한 모욕조차 나이에 맞는 지성을 가지지 못한 자신의 잘못으로 갈음하는 그런 철학을 갖춘 인생이다.

3루에서 태어나 현재 자신의 삶을 마치 스스로 일궈낸 양 거들먹거리며 갑질하는 그런 인생철학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창피스러운 일이다. 만약 쉰한 살의 나이에 뭔가를 시작할 용기가 없다면? 저자처럼 통렬하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 들추어 낼 수 없다면, 저자와 같은 삶 앞에 예의를 보여줘야 한다. 고통에 대한 예의를 갖추란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올바르게 살아낸,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그러란 말이다.


'다만 '이렇게 살면 안 된다.'까지는 아니겠지만 '내가 이 작자 정도는 아니잖아?"라는 위로는 있을지 모르겠다. (p. 253)'

저자야말로 '이 작자'라는 식의 말로 자신을 깎아내려선 안된다. 글 쓰는 일이 좋아하는 일이었고 '운 좋게 노력이라고 느끼지 못한 노력을 한 시간이 있었을 뿐이다. (p. 236)'라며 이를 행운이라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노력에 행운이란 없다.

위로는 된다. 저자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있고, 그 결과에 저자가 만족하는 듯해서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정혁용 작가의 삶이 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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