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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8월
평점 :
엘리스에게는 아주 희미한 냄새를 구별하는 것은 물론 한번 맡은 냄새를 영원히 기억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직업은 조향사다.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엘리스는 친구들과 놀러 간 놀이공원에서 점쟁이로부터 뜻밖에 이야기를 듣는다.
'"진짜 흥미로운 이야기." 점쟁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남자,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오래전부터 네가 찾고 있는 남자, 그 남자가 방금 전에 바로 네 뒤를 지나갔어." (...)
"인내심이 필요해. 그 남자에게 이르려면 여섯 사람을 만나야 하니까." (...)
"아름다운 여행, 무엇보다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때가 너무 늦을까 봐 네가 알아야 하는 것을 미리 말해준 거야... " (p. 29~ p. 32)'
엘리스의 이웃에는 달드리라는 조금은 괴팍한 성격의 독신남이 산다. 그는 교차로 풍경만 그리는 화가다. 달드리의 소원은 햇살이 통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바로 그곳이 옆집에 사는 엘리스의 방이다.
달드리는 엘리스에게 자신이 여행경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점쟁이가 엘리스에게 가라고 한 이스탄불 여행을 제안한다. 조건은 이스탄불에서 만나게 될 여섯 남자 중 두 번째 남자를 만날 때까지만 동행하고, 그 이후에는 런던으로 돌아와 엘리스의 햇살이 비치는 빈방을 달드리 자신이 사용하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조건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 마르크 레비가 펼쳐내는 엘리스와 달드리의 이상한 여행이 시작된다. 이스탄불에는 어떤 인생이 엘리스를 기다리고 있을까? 엘리스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남자를 만나게 될까?
자신의 미래를 점쟁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가 한 말을 믿었는가 아님 그냥 흘려보냈는가. 흘려보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자신의 바람이나 걱정하는 뭔가가 점쟁이의 말에 들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운명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라기보다는 믿고 싶다든지 안 믿고 싶다든지 하는 생각의 문제인듯하다. 내가 바라는 운명이라면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실현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특히 사랑이라면, 짝사랑이라면 운명의 여신이 내 편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고백할 용기가 없어서 그렇고, 그 대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확신이 들지 않아 운명을 끌어들인다. 반대의 경우라면 운명을 애써 외면하며 피해 갈 것이고...
자신이 없을 때, 그 바람에 미련이 남을 때, 운명의 장난에 나를 맡긴다. 달드리 씨가 엘리스와 함께하는 이상한 이스탄불 여행에 자신의 사랑을 맡기며, 운명이 엘리스의 선택에 관여하기를 바라듯이 말이다.
체념할 때도 운명은 도움이 된다. 모든 탓을 운명으로 돌리는 것보다 쉬운 일이 있을까? 그렇지만 결국 운명도 나의 선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운명에 맡길지 안 맡길지 그 선택을 내가 했기 때문이다.
'"앨리스, 네 안에는 두 개의 인생이 있단다. 네가 아는 인생과 오래전부터 너를 기다리고 있는 인생... " (p. 57)'
점쟁이를 만난 후 엘리스는 악몽에 시달린다. 꿈속에서 본 그곳을 이스탄불에서 보게 되고 그곳의 냄새가 왠지 익숙함을 알아챈다. 냄새가 엘리스 어린 시절의 또 다른 인생을 불러냄으로써 엘리스에게는 냄새로 기억하는 인생 하나가 더 존재하게 된다.
나의 인생에 운명이 들어오면 내 삶에 대한 기억이 바뀐다. '모든 것이 운명이었어.'라는 선택을 하는 순간 오래전부터 기다리던 내가 바라던 인생이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대 앞에 서 있는 운명이 될, 운명이 된 '일곱 번째 만난 사람'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도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왜요, 당신은 (일곱 번째 사람이 될) 그런 생각 없어요?"
"물론, 그럴 생각이 있죠.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아직 나의 단점을 다 몰라요. 시간이 지나면 아마 견디지 못할지도."
"나는 아직 당신의 장점도 다 모르는데요?"
"아, 그러네요. 그건 생각 못 했는데..." (p. 383)'
운명은 아직도 그 사람의 장점을 다 알려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