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진정성 - 깊은 사색으로 이끄는 36편의 에세이
김종진 지음 / 효형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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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내내 내 머릿속에 맴돌던 장소와 공간은 내가 태어났고 열두 살까지 살았던 고향이었다. 면 소재지였다. 휴전선 부근이라 군인들을 흔했다. 대북 대남방송이 섞여 온종일 들렸고 동산이나 들판엔 북한에서 보내온 삐라가 지천이었다.

'세상 모든 장소와 공간에는 그곳만의 맛과 향기와 모양과 소리와 감촉이 있다. 이를 풍부하게 감각하는 일은 우리 존재의 층위를 깊게 만든다. (p. 5)'

내가 살던 집 건너편에 초등학교가 있었고, 우리 집 장독대 뒤쪽 집에는 고모님 살고 계셨다. 그 뒤엔 옷 장사를 하던 친구네 집, 솜틀집, 멋지게 국수를 널어 놓은 방앗간이 이어졌고 그 앞으로 방첩대가 있었다. 할머니 댁에 갈 때는 서낭나무가 있는 언덕을 지나가야 했다. 무서워 멀찍이 돌아다녔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우물 옆에 자리한 신기료 아저씨와 뻥튀기 아저씨 인기가 제일이었다. 신 깁는 모습을 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옆에서 뻥 소리가 날 때마다 뛰어가 흩어진 뻥튀기를 주워 먹었다.

고향의 마을에 대한 기억들이 무수히 계속된다. 지도가 내 머릿속에 선명하다. 지나다니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언제가 본 영화처럼 스쳐 지나간다. 냄새도 집집마다 달랐다. 그곳을 기억하는 모든 감각이 되살아났다.


공간 미학을 가르치는 김종진 교수는 공간을 사유하는 서른여섯 편의 이야기를 <공간의 진정성>에 글로 담았다. '거닐고 머무름', '빛과 감각', '기억과 시간'이라는 소주제로 콜라주 했다.

'공간은 이렇게 우리를 거닐고 머물게 한다. 짧은 시간으로 보면 이곳저곳으로 이동하고 머문다. 하루를 보면 아침에 집을 나서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온다. 사람의 일생으로 보면 땅에서 태어나 한평생 거닐다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 (p. 45, 46)'

고모님 댁은 볼거리, 먹거리가 많아 어린 나를 머물게 하는 곳이었다. 시선은 고모님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곱디고운 한복에 고정되어 있지만, 다리 꼬고 누운 내 생각은 이리저리 헤매며 돌아다녔다.

'그늘은 그림자와 다르다. 그림자는 빛과 대비를 이루는 말로, 보통 물체에 가려 빛을 받지 못하는 상태나 부분을 뜻한다. 반면 그늘은 빛이 없는 상태나 부분이 아니다. 그늘은 빛도 어둠도 아닌, 즉 빛과 어둠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는 상태다. (p. 97, 98)'

가운데 넓은 마당이 차지한 할머니 댁에는 항상 빛도 어둠도 아닌 그늘진 마루와 방이 있었다. 그늘은 서늘함과 약간의 눅눅함을 지녔다. 햇빛이 문에 바른 창호지가 통과하는 순간 검은 먹이 번지듯 만들어진 그늘이다.

'칼비노는 도시 공간과 사물의 의미를 삶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계단 형태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그 계단과 특정 사건의 만남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그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 또 어떤 사람은 조용한 밤, 연인과 그곳에서 사랑의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에게 계단은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p. 157)'

고향에 다른 아이들 보다 발달이 좀 늦은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 아이가 놀아주지 않으니 심심해했다. 그 아이는 우리 집 문지방에 걸터앉아 문지방 틈 고운 흙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흩으며, 그중 내가 제일 만만했던지 날 불러내곤 했다. '~야 빨리 나와'라는 말을 '~야 빵 나와'로 말했다. 우리 집 문지방은 조그만 여자아이가 걸터앉곤 하는 의자로 내 기억에 새겨졌다.


공간에 대한 사색을 어쩜 이리도 다양한 경로로 다채롭게 할 수 있을까? 오감을 동원해 장소와 공간의 경험을 포착한 글이다. 사유의 폭과 깊이가 남다른 에세이여서인지 큰 울림이 가슴에 전해진다. 저자의 풍부한 글에 덩달아 나의 사유도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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