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플롯 - 문학에서 발견하는 무한한 좌표들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6
황모과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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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에서 돌아온 뒤 주변이 이전과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고 느낀 건 조카 시환 때문이었다. (p. 9, 첫 문장)'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공 나현은 뭔가 낯선 느낌을 갖는다. 여섯 살 조카는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변했다. 평소라면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나현의 언니도 말수가 적다. 웃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보고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며 무감각하다. 심지어 감각은 불필요하며 생존에 지장이 있다고 여긴다. 웃음을 터트리는 나현에게 의사는 '감각 과잉 감정 과발산증'이란 진단을 한다.

'제87차 서브플롯 실패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라!'
퀘스트 클리어에 실패했습니다.
메인플롯으로 돌아갑니다. (p. 53)'

기이한 분위기임에도 나현은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이런 낯선 상황은 반복된다.


나현이 기획한 스토리는 헤딩 엔딩이었다. 하지만 나현이 살아가는 실제 삶의 메인플롯은 나현이 계획했던 스토리와 달랐다. 엄마도 언니 미현도 죽었고,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둘만의 세계를 만들곤 했던 친구 송인도 친구들의 따돌림으로 죽었다.

지옥 밑 지옥을 헤매는 앙상한 몰골의 나현, 생의 기운을 다 토해버린 상태로 그가 도착한 곳은 여성 홈리스 마약 중독자 지원센터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데도 잃을 것이 계속 생긴다. 진저리 치는 나현에게 지원센터 담당자가 제안한다. 서브플롯을 개작해 메인플롯을 바꿔보자고. 이제까지 나현에게 허락되지 않은 삶으로 메인플롯을 각색해 보자고.

'"서브플롯이 뭔가요?"
"당신의 삶을 그린 이야기이지만 당신이 직접 경험한 메인플롯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이 만나고 싶었던 두 번째 이야기예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완전히 새로 쓰는 겁니다." (...)
"서브플롯은 당신이 구상한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 (...)
그래, 한 번 해보자. 내 이야기니까. 이번엔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볼래. 내가 주인공이야. 내게도 평범한 삶이 허락된다면, 정말로 가능하다면, 꼭 보고 싶었던 장면을 만들어볼래. (p. 136, 137)'

내 이야기가 없는 세상 이야기에, 그것도 주변에 나현은 머물러 왔다. 나현의 삶에서 정작 나현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심장만은 가지고 살고자 했었다. 서브플롯으로 나현은 무엇을 구상했을까? 그래서 메인플롯은 바뀌었을까?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후회가 가득하다. 앞을 쳐다봐야 하는데 쌓인 후회에 미련이 남아 뒤로 돌아다본다. 어떤 땐 아예 뒤로 돌아 걸어온 길을 한참 쳐다본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고.

'"모든 사람을 작가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요. 자신이라는 가장 유니크한 이야기의 작가요. 이 생은 온전히 당신만의 이야기니까요."
나만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만든 이야기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구했다는 결론은 더욱 마음에 들었다. (p. 218, 219)'

작가 황모과는 소설을 통해 제안한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유니크한 존재 '자기 자신'이라는 작품의 저자 (p. 5)'이니 뒤돌아서서 '이랬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이야기로 서브플롯을 만들어보라고. 그래서 진저리 치는 곳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구원하는 메인플롯 이야기를 만들어보라고. 이왕이면 해피엔딩으로 스토리 끝을 맺으라고.

누군가 나타난 허황된 스토리라고 거짓말이라고 훼방을 놓아 혼자 힘이 부친다면, 가족, 친구, 이웃 모두를 엑스트라 또는 조연으로 등장시켜 그들을 자신의 메인플롯 이야기의 증인으로 만들어버리라고 한다. 남이 내 인생을 멋대로 탕진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이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믿어야 한다고. 그 힘을 믿기에 황모과 자신도 작가 되었다고...

'남의 이야기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모양이었다. (p. 214)'

그리고 작가 황모과는 자신이 사는 이 세상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서브플롯으로 이 소설을 썼노라고...

'자기 죗값을 피하려는 자가 제왕적 권력을 획득한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보며 이 소설을 구상했다. 그때 예감했던 일들이 다분히 나이브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범한 삶을 완전히 파탄 내는 일들이 횡행하고 있다. 자기 보전과 바꿔 나라의 주권을 넘겨버리곤 사람들과 일상을 과로와 생활고로 밀어 넣은 자들이 이래도 버틸 거냐고 협박이라도 하는 것 같다. 진실이 승리한다는 믿음이. 그래도 살아보자는 각오가 다 헛되게만 느껴진다. 열패감이 찾아온다. 사실 이겨본 경험이 많지 않다는 사실까지 쓰라리다. 이 세상도, 그리고 나 자신도... (p. 236, 작가의 말)'

그래서 작가 황모과의 메인플롯도 자신이 주인공이 이야기로 바꾸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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