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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날들
정지아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2월
평점 :
정지아의 단편 11편을 담은 <나의 아름다운 날들>. 10년 전 출간됐던 그의 소설집 <숲의 대화>의 개정판이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정지아 작가를 알게 됐다. 특유의 유머, 그 유머 때문에 페이소스가 더 강렬했던 글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다.
한때 정지아는 거들먹거렸던 모양이다. 어른이라 여겼고, 인생을 안다고 자부했고, 소설에 대해서도 다 아는 것 같았고... 오십을 눈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살아가기, 소설 쓰기 모두 모르겠고 어려워졌다. 겸손해진 거다. 성장의 동력인 겸손을 얻고서야 노동의 진수, 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고백한다.
'살아 있으니 살 것이고 쓰는 재주밖에 없으니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쌀 같은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소설을 위해, 농부의 정직한 땀방울,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좋겠다. (p. 353)'
정지아 작가만 그랬을까. 인생을 얼마나 호기롭게 시작했나. 나의 환경을 비교하지 않았던 시절에 말이다. 내 능력이면 충분했다.
나이의 차이는 있겠으나 정지아가 오십에 접어들 때쯤 알게 된 것들을 뼈져리게 느끼는 시기를 맞이한다. 내가 사는 세상에 1%가 보이고 99%가 보인다. 절망스럽게도 나는 99%에 속했다.
미디어는 세상 사람들의 1%의 삶만 조명한다. 마치 99%는 없는 양. 더 속상한 건 99%도 자신의 존재를 잊고 1%만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의 삶에서 희열을 느낀다.
정지아의 단편집 <나의 아름다운 날들>은 99% 삶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준다. 그 삶에도 가치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니 1%의 삶만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돌려 눈을 99% 삶, 아니 자신의 삶으로 향하기를 권한다.
그동안 외면했던 99%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범함 삶, 기적과 같은 삶을 그들과 나는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숲의 대화>에서 종놈인 주인공은 주인집 도련님의 이념과 그의 사랑까지도 포용한다. 이는 더 이상 무식하고 하찮다고 치부해버리는 종의 삶이 아니다. <봄날 오후, 과부 셋>에서 절친인 세 여인은 성격, 경제적인 환경, 삶의 가치 어느 하나 일치하는 게 없지만 티격태격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간다.
<천국의 열쇠>의 주인공은 날 때부터 의지와 상관없이 사지가 따로 논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천국인 3000평 헛개나무 밭의 열쇠를 베트남에서 시집와 절망 속에 살아가는 호아와 공유한다. <목욕 가는 날>의 둘째 딸처럼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기도 한다.
<브라보, 럭키 라이프>에서 보여주는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기적을 고대하는 사랑은 가슴이 벅차오른다. <핏줄>을 잇는 것에 가치를 둔 전통을 앞에 두고 끊임없이 화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혜화동 로터리>의 두 주인공은 이념도 갈라놓지 못하는 우정을 과시한다. <인생 한 줌>이 되어 흙이 될지언정, 자신의 삶의 가치가 끝내 돌덩이로 판명 날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
<즐거운 나의 집> 주인공인 작가처럼 자신의 사정을 알아주는 작자들이 주변에 하나도 없을지라도 그냥 푸념하며 견디어 살기도 한다. <절정>의 노숙자들은 죽기도 살기도 어렵고, 꿈이 독인 걸 알지만 노숙자로 전락하는 것이 두려워 꿈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며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내며 살아간다.
<나의 아름다운 날들>의 주인공만이 눈부시게 찬란한 인생, 1%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왠지 목이 멘다. 자신의 삶이 없고 아버지, 남편, 자식들에 의해 치장된 삶이어서다. 어쩌면 1%의 삶을 사는 주인공이 진정 원하는 삶이 자기의 삶을 당차게 사는 남들이 모르는 비범한 99%의 삶이지도...
'99%의 사람들은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천형인 양, 운명인 양, 차라리 습관인 양 견디고 살아간다. 그 '평범한 비범함'이야말로 이 참혹한 세상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건너가게 만드는,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치면서도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기적이 아닐까. (p. 351, 작품 해설, 정여울 문학평론가)'
타고난 자기의 생의 잔임함을 똑바로 쳐다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겨우겨우 살아가는 99%의 삶을 향한 사랑과 그 기적의 삶이 발하는 눈부심을 증명하는 정지아의 열한 편의 짧은 이야기 <나의 아름다운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