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방인 ㅣ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평점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p. 16, 첫 문장)'
카뮈의 <이방인>은 이 첫 문장 하나면 충분했다. 첫 문장에 소설 모두를 담았다. 고전 중에 고전(김영하 작가가 말하는 고전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 <이방인>을 읽었다. 처음 읽지만 '다시' 읽는 거라 변명하면서, 처음 읽지만 '다시' 읽는듯한 느낌을 갖고서 읽게 되는 고전 <이방인>.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후 평상시와 같은 일상을 보낸다. 이웃 레몽과 별장에 놀러 갔고 거기서 또 만난 아랍인을 총으로 죽인다. 이 사건으로 재판에서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거짓말을 거부하고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면 낯선 '이방인'이 되는 사회다. 그 사회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한다. 나는 이정서 번역의 <이방인>을 이렇게 읽었다.
카뮈는 <이방인>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단지 이 책의 주인공이 그 손쉬운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선고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p. 5)'. '그는 실재하는 것을 말하고, 그의 느낌을 숨기기를 거부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사회는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p. 6)'
'"그는 거짓말을 거부한다… 그래서 어떤 영웅적 태도도 취하지 않고,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서 <이방인>을 읽으면 크게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카뮈가 한 말이다. (p. 11, 역자의 말)'
옮긴이 이정서 대표는 이 말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면 <이방인>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번역서가 잘 안 읽힌다면 비난의 대상은 옮긴이가 된다. 반면 책을 매끄럽게 읽었다면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온 힘을 다했던 옮긴이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번역의 완성도를 옮긴이 혼자 흡족해하며 즐길뿐이다. 번역 세계의 실상이다.
이 책은 새움출판사의 '원전으로 읽는 세계문학 움라우트' 시리즈 중 하나다. 번역서를, <이방인>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면 번역의 잘못이고 그 원인은 의역이라고 생각한다. '움라우트 시리즈'는 원전 그대로, 작가의 글 서술 구조, 쉼표 하나까지 그대로의 번역을 추구한다.
소설 중간중간에 <이방인>의 오역과 왜곡 사례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그가 그 여자의 이름을 말했을 때, 나는 그녀가 무어인 여자라고 생각했다. (p. 52)'라는 대목으로 들어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아랍인은 레몽에게 쫓겨난 여자의 오빠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여자는 무어인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내가 결코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 있다. (p. 98)'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번역된 책이 없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이것을 '자위행위'라고 해설한다.
작가들은 자신의 소설 첫 문장에 많은 힘을 들인다. 첫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특히 <이방인> 첫 문장은 더욱 그렇다.
새움출판사 <이방인>의 첫 문장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이다. 모두들 '돌아가셨다' 보다 '죽었다'가 더 시니컬한 번역으로 뫼르소의 성격을 잘 표현했다면서 초점을 여기에 맞췄다면, 이정서 옮긴이는 쉼표의 의미에 더 주목한다. '엄마가 죽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가 아닌 '오늘,(쉼표) 엄마가 죽었다.'
번역의 세계를 잘 모르더라도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을 비롯한 <위대한 개츠비>, <노인과 바다>, <동물농장>...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시리즈를 읽는 때 번역에 초점을 맞춘다면 즐거움은 배가 될 수도 있으리라. 번역이 창작 활동이면서도 원작자의 문체를 살려야 하기에... 참 어려운 작업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