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락의 아내
토레 렌베르그 지음, 손화수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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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사이로 피가 흘렀다. 이 하나를 손바닥 위에 툭 내 뱉었다. 하루 종일 세차게 내리치던 비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그쳤다. (p. 9, 첫 문장)'

노르웨이 문학의 거장 토렌 렌베르그의 소설 <톨락의 아내>는 악성종양으로 죽음을 앞둔 톨락이 아내 잉에보르그를 그리워하는 추억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톨락은 아들 얀 비다르와 딸 힐레비를 기다리고 있다. 21년 전, 아내 실종 사건, 그 의문의 진실은 아이들에게 고백하려고 한다.


'나는 톨락. 잉에보르그의 남편이다. 나는 과거에 속한 사람.
여기는 내 자리이며,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p. 10)'
목재소를 운영하는 톨락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과거에 얽매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침묵에 익숙하고 성격이 거칠었다. 많은 이들도 그를 산 채로 살갗을 벗겨내 산 채로 불속에 던져버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잉에보르그가 있다.

아내 잉에보르그.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항상 밝았으며, 호기심이 많았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했다. 목재소에서 일하고 있던 톨락에게 그녀가 먼저 다가왔고 결혼했다.

'곧 그들이 올 것이다. 힐레비와 얀 비다르.
불같은 내 딸과, 느긋하지만 집요한 내 아들. (p. 19)'
톨락은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항상 잉에보르그가 보살폈다.

톨락에게는 힐레비와 얀 비다르보다 언제나 입양한 아들 오도가 우선이었고 사랑으로 보살펴야 하는 대상이었다. 오도는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그런 아이다.


소설 내내 톨락의 시선으로 톨락의 독백이 이어진다. 소설의 실제 시공간은 어느 날 밤, 톨락의 집뿐이다. 독백은 짧은 문장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갈등이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데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와 화해하기 마련이다.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과거에 행했던 모든 일과 과거에 보았던 모든 것과 과거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차례 눈앞에 스친다. 하나도 빠짐없이. 좋든 싫든. 바로 그때, 우리는 스스로와 화해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p. 55)'


아이들도 성장하여 떠나고 아내가 사라진 후 세상과 등지고 사는 톨락의 곁에 남은 건 오도뿐이다. 톨락의 아내가 실종된 사건의 발단도 오도로부터 시작됐다. 어느 날 톨락을 찾아온 오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톨락의 자식이다. 오도에게서 톨락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오도를 건드리는 사람은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

'오도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자기만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한다. (p. 206)'
집 앞 들판에 아내 잉에보르그를 묻은 것도 오도와 함께였다.

아내 잉에보르그는 오도를 친절하게 대하고 정성을 다했지만, 언젠가부터 지적 장애아인 오도를 보살피는 일에 아내는 지쳤다. 아내는 톨락의 시선을 피했고 밝고 긍정적이던 잉에보르그의 가슴속에 분노와 울분이 쌓이기 시작했다. 아내의 그런 모습에 톨락은 슬픔과 절망에 빠졌고 급기야 톨락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주먹을 때려 숨지게 했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남자일 뿐. (p. 115)'
한순간 참지 못했던 분노로 평생 아내를 그리워하며 후회와 악몽의 삶을 살아간다.


톨락은 아내를 한없이 사랑했다. 그런 아내라 할지라도 자신의 모습을 가진 오도를 얼간이 취급하고 그를 쫓아내고 싶어 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었다. 오도에 대한 지나친 사랑은 톨락과 힐레비, 얀 비다르와의 관계도 악화시켰다. 상처가 됐고 그 상처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론 톨락은 아내를 그에게서 앗아 간 오도와 관련된 일 모두를 증오하기도 한다.

톨락은 딸 힐레비와 아들 얀 비다르에게 아내 실종 비밀을 알려주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다른 면 즉, 오도에게 불친절했던 모습을 알려주었을 때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실망하는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똑같은 일이라도 과거와 현재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서로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스스로 설득하는 톨락, 그때는 지금과 같이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자신에게 고백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이들에게 진실을 고백하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선택을 했지만, 톨락 그는 죽음 맞이할 때까지도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해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 이름은 톨락.
나는 과거에 속한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과도 걸맞지 않는다. (p. 260)'


짧은 호흡으로 일관된 문장과 단락은 우리를 몰입으로 이끈다.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고집과 단절로 점철된 인생의 톨락, 그의 독백 속의 세밀한 심리 변화 묘사, 이 모두가 이 소설의 매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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