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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2년 7월
평점 :
책이 말을 걸어왔다.
'일단, 신뢰를 좀 쌓읍시다. (p. 9, 첫 문장)'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이 안내서를 쓴 작가는 요아브 블롬이 아니다. 어떤 전지적 작가다. 그가 차기작 슬럼프에 빠진 요아브에게 원고를 전달했고, 요아브가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이 책의 작가를 요아브 블롬이라 여길 것이다. 전지적 작가도 그렇게 예언했다.
'이 책을 쓴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는 말을 책 한가운데에 인쇄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당신이 작가라고 생각할 겁니다. (p. 204)'
전지적 작가는 이 책을 15년 동안 썼고 열두 번의 개고를 거쳐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할 수 없다는 사실과 독자 모두에게 말을 거는 책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이 요아브를 이름으로 출간했고, 네 사람만을 위해 이 책을 썼고 책의 말미에 그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러니, 고맙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괄호 속 단어들을 많이 쓴 벤에게.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영국 팝을 듣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보조개가 있는 바텐더 오스나트에게.
모두에게 이 책이 자기 것이라고 말해 주기로 한 요아브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p. 462)'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 책의 7장 98쪽에서 아래와 같이 책이 말할 때까지,
'청하지는 않았지만,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을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끝내지 마십시오. 당신이 찾는 게 변화라면, 여기 그대로 머무르세요. (p. 98)'
다시 말해 98쪽을 읽을 때까지도 이 소설의 내용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 책 저자의 상상력이 참신하다 못해 기상천외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따라 펼친 내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발견한 책의 뒤표지에 내 이름이 적혀있고, 책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다니.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고 있다니...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칠 수 있는 스토리다.
평범하다 못해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주인공 벤 슈워츠먼, 그는 남들에게 관심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그의 경험에서 얻은 건 패배감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세상과 소외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지녔다. 그런데 용기가 없다.
어느 날 벤은 변호사로부터 하임 울프의 유품인 위스키 한 병을 전달받고, 서점에서 발견한 책 <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가 말을 걸어온다. 이 안내서는 벤을 일상에서 강제로 탈출하게 만들고, 위스키를 마신 벤 앞에 새로운 경험을 지닌 벤이 나타나 이전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벤이 그토록 욕망했던 삶이 펼쳐진다.
벤의 위스키뿐만 아니라 지하에 보관된 하임 울프의 많은 병안에는 각기 다른 경험들이 담겼다. 경험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기억은 머릿속에 저장한 자료의 한 조각이니까. 경험은 완전히 다른 문제야. 경험은 사람을 변화시키니까. 우리가 파는 것도 그런 거란다. 정보가 아니라 변화. (p. 134)'
경험은 행동으로 얻는다. 그 경험은 사람을 바꾼다. 만일 내 경험을 타인에게 심는다면 그 사람을 나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어 통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경험은 사실 '떠올리지 못함'이라는 공간에서 '떠올림'이라는 공간으로 기억을 이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p. 417)'
경험은 '떠올리지 못한 것'을 '떠올림'으로서 벤처럼 새로운 나를 탄생시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한다. 매혹적인 체험을 하게 한다.
책과 술을 둘러싼 미스터리 판타지.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경험으로 내가 바뀔지도 모른다. 이제껏 상상만 했던, 웅크리고 잠자고 있었던 새로운 삶이 내 앞에 펼쳐지는 판타지를 경험할 수도 있다. 용기가 생긴다. 내 삶을 응원한다. 희망이 있다.
'모든 책은 암호를 해독하는 암호다. 책이 암호인 이유는 아무도 그 책이 쓰인 방식대로 정확하게 그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읽는다. 독자가 해독한 내용은 암호를 적용한 사람의 의도와 절대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책은 작가의 내면에 있음에도 작가 자신도 몰랐던 것을 해독해 주기도 한다. 암호를 작성하는 와중에 말이다. (p. 461)'
네 사람만을 위해 쓰여진 책, 넷 중에 한 사람은 '나'다. 책 속의 주인공 벤, 오스나트 그리고 저자라 할 수 있는 요아브와 함께 내 나름의 암호로 책을 해독할 때 이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