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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박자 느려도 좋은 포르투갈
권호영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4월
평점 :
나의 유럽 여행은 패키지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게 패키지여행의 특징이다. 패키지여행에서 모이는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건 가장 큰 민폐다. 부지런함이 필수다. 패키지여행은 왜 여행하는 건지도 애매하게 만든다. 외국에서 우리나라 여행객이 렌트한 자동차의 이동거리가 으뜸이라고 하지 않던가.
'한 박자 반 정도 느린 편이다, 나는 한 박자 서두른 게 분명했는데, 한 박자 반만큼 뒤처지니 다시 그만큼 뒤에 있다. (p. 4)'
권호영의 책 <반 박자 느려도 좋은 포르투갈>과 함께하는 여행은 느린 여행, 조금은 뒤처지는 여행이다.
아줄레주 타일 벽화가 말을 걸어온다. 활주로에서 선홍빛 물감을 풀어놓은 하늘을 한참 본다. 천천히 걷다 보니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고, 카페의 옆 테이블에서 나누는 이야기도 들으며 타인의 삶도 잠시 엿본다. 돌바닥도 눈에 들어오고 커피향도 맡는다. 재래시장에서 그곳의 색깔을 지닌 과일도 산다. 마주하는 색깔도 여러 갈래로 눈에 들어온다.
'우아한 빈티지 색감을 자랑하는 히베이라의 집들은 마치 색연필 세트를 선물 받았을 때의 파스텔 톤 기쁨을 어렴풋이 느끼게도 하였다. (p. 62)'
완행열차에 몸을 실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을 살피며 근사한 스토리를 꾸민다. 그 동네 책방도 들러 책을 고르는 틈도 가진다. 지나치다 어느 집 앞에 멈춰 담 너머를 궁금해하기도 한다.
카페 앞 경사진 돌바닥에 의자를 기울인 채 불편하게 앉는다. 3초 동안 지나가는 푸니쿨라를 지켜보고, 맥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푸니쿨라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느려도 좋은 여행이기에...
바람에 바랜듯한 파스텔 톤 색상의 아줄레주 타일 벽화와 같은 상큼하고 톡톡 튀는 느낌의 글은 여행의 맛을 더한다. '요즘 나는 어휘력을 잃고 있다. (p. 104)'는 엄살을 떨긴 하지만...
'시간은 세상 모든 고양이의 발걸음에 비례하여 둥글게 둥글게 회전하고 있었다. (...) 눈썹처럼 짧은 시간이라도 가만가만한 내 심정이 불안에 데지 않도록. 물과 햇빛 같은. (p. 5)'
'오후가 되니 커피향이 돌바닥에 스며 들었다. 우산을 쓰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비가 묻었다. (p. 52)'
'창문으로 비가 그쳤음을 알려주는 빛이 들어왔다. 책 사이에서 출렁이는 빛의 추임새는 분명 아름다운 도서관 분위기를 더욱 살리고 있다. (p. 81)'
'바다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아침이었다. 바스락거리는 하얀 이불에서 하얀 파도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p. 177)'
이금이의 <페르마타, 이탈리아>에서 만난 알록달록 색깔의 건물이 시선을 끌었던 부르노 섬. 같은 사연의 마을을 포르투갈에서 만났다. 아름다운 색깔의 줄무늬 집들이 촘촘한 코스타노바. 바다로 떠난 어부들이 집에 돌아올 때, 잘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같은 두 곳.
30분만 더 누워있다가 다시 짐 챙겨 떠나는 여행. 에그타르트, 커피, 와인 그리고 파두를 들을 수 있는 곳. 아직 트램이 다니고 곳곳에 아줄레주 벽화가 있는 두 발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에린과의 포르투갈 여행. 패키지여행과는 다른, 반 박자 느려도 좋은 여행이 주는 마음의 여유다.
'햇살은 커다란 창이 난 곳으로 하염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얀 커튼 그림자가 출렁거렸다. 기지개를 쭉 켜고 침대 옆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블루투스 오디오를 켰다. 호텔 로비에서 틀어주는 음악을 방에서도 들을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 만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잔잔하고도 리드미컬한 노래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30분을 더 가만히 누워있었다. (p. 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