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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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이 탁자에 닿으며 달각 소리를 냈다. 눈앞에 놓인 자장면을 보고 젓가락을 들었다. 몇 입 먹지 않아 조가 냅킨을 뽑아 내 앞에 두더니 턱에 양념이 묻었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얼른 냅킨을 집어 턱을 닦았다. 조가 가볍게 웃고는 면발을 가득 집어 크게 베어 먹었다. 이번에는 내가 냅킨을 뽑아 조의 앞에 두었다. 얼굴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도 조는 냅킨을 집어 입가를 닦았다. 나는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고 면을 집었다. 다행히 자장면은 맛있었다. (p. 119)'

소설 전반에 걸쳐 이런 세밀한 묘사의 흐름이 이어진다. 지나칠 정도의 상세한 서술은 다소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의미 없이 하루하루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을 준다. 작가의 세밀하고 고요한 분위기의 글에서 두 편의 소설이 떠오른다.

결정조차도 우연으로, 극적 장면이라곤 하나도 없는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을 다룬 최근에 읽은 이태승의 <근로하는 자세>. 또 하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로 런던 거리와 거리를 걷는 인물들을 그 내면까지 보이도록 자세히 묘사하는 장면들이다. 울프는 이 순간을 '존재의 순간'이라고 했다.


내가 머물렀던, 그리고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는? 1의 자리? 아님 0의 자리?

20대의 주인공 나는 정리해고로 백수가 된다. 수험생, 취준생, 직장'생'에 가까웠던 나는 '생'의 자리를 박탈당하자 어떤 '자리'라도 잡아야 한다는 위기감에 우연히 발견한 약국에 취직한다. 하지만 1의 자리라고 여긴 그 자리는 나이, 학력, 경력 무관이라는 채용 조건으로 누구라도 대체 가능한 '자리'이다.

'0에서 1로 변모하는 과정은 설레면서 우울하다. 곧 1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므로 0에 가까운 자신을 체감하게 된다. 첫 출근 날에는 0.0000001쯤 되는 기분이었다. (p. 34)'

약국의 국장은 처음부터 주인공 나를 유령이라 부른다. 그쯤은 대수롭지 않을 일로 여기며 0.0000001쯤에서 시작한 나는 김 약사의 갑질을 견디고, 약의 이름을 외우고 처방전을 입력하는 등 약국의 자리에 적응한다, 그 자리에 익숙해져 0.9에 이를 때 나는 더 이상 급여가 오르지 않고 그것이 내가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다는 의미임을 알고 어느 날 건조대에 빨래를 널다가 약국을 그만두기로 한다.

주인공 나는 다시 0의 자리로 돌아왔고 새로운 곳에 면접을 보면서 0.1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에 들어선다.


작가는 주인공 나를 비롯해 약국 주인 김약사, 조부장, 주인공의 지인 '혜'라는 소설 속 인물 모두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름은 존재를 뚜렷하게 드러내며 역할을 한다. 이름 대신 김 국장, 조부장, 혜로 불리는 건 인물을 흐릿하게 만든다. 자리를 잡으려 노력하지만 어렴풋하게 유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희미하게 희미하게 존재감 없는 삶이다.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있을 법한 상황들이다. 천천히 흘러가는 일상조차도 우리에게 익숙한 하루하루다. 이런 삶 속에서 우리 모두는 존재감을 드러내 자리를 차지하고 유령과 같은 희미함을 배제하려 애쓴다. 그 애씀으로 나의 자리가 1에 가까운 0.9에 다다르는 순간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체되어 우리 모두는 희미한 유령이 되고 다시 0.1부터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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