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하는 자세 - ‘첫 책 지원 공모’ 선정작
이태승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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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여덟 편의 이야기는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의 굴곡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p. 286)'

여덟 편을 읽고 많은 것들이 떠올랐지만 (나의 독서력이 없어) 정리되지 않아 지저분한 상태였다. 다행인 건 책의 끄트머리에서 만난 서희원 문학평론가의 해설이었다. 해설을 세 번 읽고 여덟 편의 이야기를 다시 훑어보고 나서야 머릿속이 정돈됐다.


현직 공무원인 이태승의 단편 소설은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알려진 작가가 아니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하지 않게 만난 행운이었다. 그래서 내 자신이 겸연쩍었다. 여덟 편의 주인공에서 나의 모습을 보기도 했고 삶에서 무심코 지나쳐 온 타인들을 보기도 했다.

서희원 평론가의 힘을 빌려서 여덟 편을 관통하는 작품 세계를 살펴보면,

'이태승의 소설에 한정시켜 말하자면, 문학은 다수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을 통해 관료주의의 공범이 된 인간들이 망각한 가치를 상기시킨다. (p. 283)'

여덟 편 모두의 주인공은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소설에서 기대하는 카타르시스는커녕 극적인 반전도 없다. 주인공들의 삶이 희망차고 멋진 결론에 다다르기를 소망하지만 나의 삶, 우리의 이웃의 삶과 똑같은 여덟 편 소설의 주인공의 삶이다. 인생에서 곳곳에서 내리는 중대한 결정조차 우연히 결정하는 그런 삶.

'우리가 사내커플이 된 것은 입사 동기라는 공통점과 동기 가운데 유일한 남녀 솔로였다는 사실도 한몫했지만 그보다 집 방향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종, 료, 유주> p. 167)'

'남부 지방으로 이사한 태평은 이전 세입자에게 잘못 도착한 택배를 돌려준 일을 계기로 택배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구덩이>, p. 240)'

사내커플이 되고 직업을 선택하는 계기조차 왜 이리 평범할 걸까. 뒤돌아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어 더 짜증 나는 삶이다.


표제작 <근로하는 자세>

환경부 사무관인 주인공의 상사 오 과장은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일을 철두철미하게 처리하는 공무원이다. 독일에서 열리는 장관의 G20 지구 환경 장관회의 준비도 주인공을 못살게 굴며 늘 하듯 완벽하게 준비했다. 참석자가 장관에서 차관으로 바뀜에 따라 업무가 복잡해졌지만 그 특유의 근로하는 자세로 완벽하게 차관 위주로 출장 준비를 끝낸다.

차관과 함께한 해외 출장 중 불의의 사고로 오 과장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업무 복귀 후 오 과장 앞에 놓인 현실은 이동이 느려진 자신으로 인해 동료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직원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실을 깨달으며 허사임을 알게 된다.

무엇을 위해 그만의 근로하는 자세로 일했는지 모르겠지만, 총상을 입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음에도 오 과장이 원하는 극적劇的 결과는 없었다. 그냥 휠체어 타는 걸리적거리는 오 과장만 있을 뿐이다.

'남은 사람들 ... 비서관은, 서 팀장은, 또 어떻게 되었냐고요? 그들이라고 뭐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저는 가끔 이런 생각도 합니다. 만약 그 마지막 총알이 차관이나 오 과장을 향했다면, 제 미래는 그들과 다른 모습이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모쪼록 당신은 제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길 바랍니다. (p. 74)'


'이 책을 읽는 동안 몰랐거나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당신의 모습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 287)'

잃어버렸던 나의 모습이 아니라 어쩌면 잃어버리려 무던히 애썼던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여서 불편해하면서도 짠하게 다가온, '역사와 같은 큰 이야기가 아닌 가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허황되다고 비난받은 작은 이야기(小說)'(p. 283)', 소설小說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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