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 박물지 - 인문학과 미학을 넘나드는 이어령의 시선 63
이어령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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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인을 알기 위해서 도서관은 물론이고 굳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 놓은 생활용품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 시선의 멈춤을 통해서 나는 언제나 한국의 참모습들을 만나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친숙한 도구들을 낯설게 하는 방식을 통해서 때로는 한국인의 혼과 마음을 꺼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우주적인 질서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p. 264)'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이 시대의 대표적 지성, 이야기꾼임을 자청하셨던 이어령의 마지막 도서, 인문학과 미학을 넘나드는 <우리 문화 박물지>. 이 책에서 이어령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렀는지를 보게 된다.

일상 속 63가지 사물에서 이어령은 한국인이 어디에 마음을 두는지, 어디에 더 가치를 두는지를, 그리고 그 사물에 스며든 한국인의 마음, 지혜, 심성, 아름다움, 독특한 발상을 찾아내 알려준다. 생활용품과 도구에서 느끼는 우리들의 어쭙잖은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이어령의 상상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이야기꾼 이어령의 사물을 보는 시선에 감탄한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 보면,


낫과 호미: 자기로 향한 칼날
'낫이나 호미의 아름다움은 밖으로 내밀어도 그 경고의 칼날이 언제나 자기를 향해 있다는 점일 것이다. (p. 39)'

순식간에 무기로 바뀌는 서양의 농기구와 다르게 우리의 농기구, 특히 낫과 호미는 남을 해치는 무기로서의 기능이 어렵다. 그날이 사용하는 이를 향하기 때문이다. 낫질이나 호미질을 잘못하면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다. 낫과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호미의 날이 아무리 시퍼렇게 서 있어도 남을 해치기보다는 자신에게 더 위험하고 농사에 적합한 도구임을 농부들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바지: 치수 없는 옷
'살아있는 것의 몸을 잰다는 것은 흐르는 물에 표를 해놓고 떨어진 칼을 찾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생명체를 어떻게 자로 잴 수 있단 말인가. (p. 106)'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당하지 않은가? 너무 당연해서 웃음이 나오고 말문이 막힌다. 우리의 허리 치수는 밥을 먹었을 때와 굶었을 때 다르고, 건강할 때와 아플 때 다르니 말이다. 치수에 맞게 입는 양복바지는 몸이 조금만 불어나도 허리가 쪼여 불편하고, 몸이 축나면 흘러내린다. 그래서 못 입게 된다. 한복 바지는 허리춤이 넉넉해 몸이 불어나면 불어난 대로 축나면 축난 대로 그때그때 덜 조이고 더 조여 입으면 된다. 못 입게 될 일이 없다. 옷에 사람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


정자: 에콜로지의 건축학
'그렇기 때문에 정자에는 건축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벽, 그러니까 안과 밖을 가르는 벽의 개념이란 것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p. 190)'

물과 기암절벽이 있는 아름다운 곳에 정자가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정자는 건축이라기 보다 자연의 일부다. 그 이유는 건축물의 특성인 벽의 개념, 안과 밖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의 경치를 극대화한다. 팔각정의 여덟 면의 각은 기둥 사이에 여덟 장의 풍경을 품고 있다. 자연을 자기 뜰 안에 끌어들여 정원을 만든 일본인들이 있다면, 그들과는 달리 우리는 밖으로 나가 자연 그 자체를 풍경의 미학으로 하는 정자를 만들어냈다.


흥미로워서 이 책의 등장한 사물을 만나러 다시 오려 한다. 이번 만남에선 한꺼번에 여럿을 만나지 않고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만나고자 한다. 한참의 시간을 선뜻 내어 참모습을 보며 길게 이야기하고 웃음 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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