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집약형 기업 - 직원 1인당 수익을 최대로 올리는
로엘 브라이언 외 지음, 김명철 외 옮김 / 세계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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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이 땅은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 대한 세계의 평가는 ‘미래가 없는 나라’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30년 후 세계는 스스로 보는 눈이 없었음을 자인하고 새로운 평가를 내렸으니 ‘기적의 나라’였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 등에서 들여온 차관과 기술이전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제조기업-주로 중화학 부문-을 육성하여 철강·조선·자동차·가전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섰고 자본을 투입해 산업을 더 키워나갔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을까. 1997년 세계의 경제가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더니 이내 ‘IMF 사태’라는 폭풍이 되어 한국을 들이쳤다. 미처 준비가 되지 못한 한국은 폭격을 맞은 듯 크게 주저앉았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결과였다. 거품을 걷어 낸 결과는 참혹했다. 기업과 개인의 파산이 이어졌고 곧이어 사정의 칼날이 들이치면서 이 사회는 실업자를 양산해 냈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던 한국은 심기일전하고 다시 전투에 돌입한 결과 위기를 극복해 냈고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여 크게 성공했다. 제2의 성공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바로 인터넷과 맞물려서 말이다. 그 때는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우리의 현주소는 어떤가. 이른바 닷컴 기업의 붕괴 후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은 많지 않다. 이제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의 경제가 위태로운 이 때 우리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로엘 브라이언과 클라우디아 조이스는 <사고집약형 기업>에서 직원 당 수익률을 대폭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탕사원-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며 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80%에 해당하는 사원-이 있다면 쫓아내거나 재교육 등을 통해 사원들을 관리해야 한다. 직원들의 머리에 든 무궁무진한 창조적 아이디어를 끌어내어 한곳에 모아 효과적으로 교류시키고 산업성장시대의 유산인 계층적 조직구조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 판을 다시 짜 해당 관리자들에게 인사권과 지식활용에 관한 재량권을 주어 유연성을 최대한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성공한 사고집약형 기업에서는 직원이 기업의 부를 만들어내는 무형자산의 근본으로 인식되고 있다며 직원들의 지식을 한곳으로 모아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조직으로 새롭게 설계하라고 조언하며 그 방법을 알려준다. 더 이상 자본증대에 의한 기업성장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2007년 시가총액 기준 상위 30개 기업(미국)을 분석한 결과, 1995년에서 2005년 사이 직원당 수익은 평균 3만 5,000달러에서 8만 3,000달러로 증가했고 자본수익률은 17%에서 23%로 증가했으며 이 기업들의 시가총액 중앙값은 340억 달러에서 1680억 달러로 약 5배나 증대됐다. 저자는 이러한 시가총액의 상승 동력은 자본이 아니라 바로 직원당 수익률이었다고 설명한다. 직원 1명의 수익이 5배 증가하면서 시가총액도 5배 늘어나게 됐다는 것이다. 

  내수시장이 취약한 우리나라의 경우 수출에 특히 의존하기 때문에 지금까지처럼 제조상품만 해외로 판매하는 방식으로는 저성장 시대로 돌입하고 있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앞으로도 국내 사정상 수출에 의존해야한다는 명제는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외국인 직접투자가 예전만큼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할까. 생각을 전환하면 길이 보인다. 지식경영에 그 길이 있다. 직원당 수익률을 극대화하려면 기존과는 달리 인적자원관리를 새롭게 해야 하며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신속한 대응을 위해서는 각각 책임자를 믿고 보다 큰 재량권을 줘야 한다. 인재를 외부에서 들여오기보다 교육을 통해서 이미 있는 인재를 성장시키는 방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리더는 이 모든 것을 총괄하고 관리할 책임자를 곁에 두고 스스로는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한다. 이것이야말로 미래 기업이 지향해야 할 자세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기업들이 존재하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시작하여 시대의 흐름에 맞게 체질은 변화시키고 첨단 디지털 기술을 접목시켜 시가총액을 더욱 키운 자랑스러운 기업들이 있다. 게다가 닷컴 거품이 꺼지며 벤처기업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무형자산-지식상품-을 무기로 오히려 더 성장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 기업도 있다. 벤치마킹할 대상은 충분히 있으니 붕괴된 기업에게서 교훈-도덕적 결함 등-을 배워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면 된다.

  이미 전통적인 제조기업인 자동차·항공·조선 등은 지식집약도 상승으로 수익성이 높아졌고, 가전산업은 서비스와의 결합으로 기존 수익뿐만 아니라 신규수익 창출까지 가능해졌다. 앞으로는 지식과 서비스의 조합으로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켜 보다 큰 상승을 유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정책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매우 중요한 이 시기에 잘못된 정책으로 기업이 크게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빌 게이츠 MS 전 회장은 향후 10 년간의 변화는 지난 50년 동안의 변화보다 더 클 것이라고 언급했고, 인텔의 앤디 글로브 회장은 향후 5년 이내 인터넷 등 정보기술을 비즈니스에 접목시키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대로 된 기업가라면 무엇이 옳은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남은 것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뿐이다. 

  <사고집약형 기업>에서 강조한 방법을 통해 한국 기업들이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수출 감소 추세를 역전시켜 향후 이 나라가 지식 수출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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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 - 1945년 이후 유럽과 세계
페터 가이스 외 지음, 김승렬 외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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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7월 한동안 잠잠하던 일본은 또다시 독도 영유권에 대한 망발로 대한민국을 도발하여 들끓게 만들었다. 이어 교과서에 ‘다케시마는 일본의 영토이고 한국이 무단점령하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겠다고 밝혀 논란을 확산시켰다.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동해의 일본해 단독표기서부터 일본 극우 단체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개정판 중학교 역사·공민 교과서에 일제의 조선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역사 왜곡 내용을 포함시키는 등 서로 입장이 너무도 달라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한국과 일본. 이 두 나라에 역사의 경계선 넘기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수천 년 전부터 우리와 역사적으로 맞물려 온 중국의 경우는 어떤가.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작업을 통해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통해 우리를 자극하여 불쾌함을 조성하는 그들과의 공존은 가능한 것인가? 

  한·중·일, 동북아시아 3국의 화해와 평화는 언제쯤 가능할까? 그 점을 살펴보기 위해 무대를 서유럽으로 돌려보자. 그곳에도 오랫동안 앙숙 관계에 놓였던 두 나라가 있었다. 바로 독일과 프랑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나폴레옹의 독일연방 침략에서부터 시작하여 히틀러의 프랑스 점령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 간 두 나라는 네 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룬 숙적이었다. 그것도 오래된 역사가 아닌 최근의 근·현대사였으니 그들은 서로 불신과 증오로 얼룩진 관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또한 양측의 역사교과서는 서로의 입장에서 상대를 비판하거나 심하면 비난을 하는 등 문제가 많을 것으로 짐작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라는 책을 통해 중등교육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일선에서 가르치는 역사교과서를 공동으로 제작한다는 것은 협력·공존·평화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무엇이 불신과 증오로 얼룩져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두 나라를 화해와 공존의 길로 걸어가게 했을까?

  바로 답은 ‘민간’에게 있었다. 책에 따르면 1930년 전후 프랑스 역사교육계의 선각자들로부터 시작된 양국의 관계 개선에 대한 노력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 평화주의를 지향해 마침내 독일 역사교육계의 참여를 끌어내었고 수십 년 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실이란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의 출간과 교육이다. 오랜 민간의 노력과 더불어 독·프 청소년의회의 요청에 두 나라 정상이 수락을 하여 결국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앞장섬과 배우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교과서를 스스로 만들려는 노력과 열린 정신에 그야말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하면서도 양국의 집필진이 교차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는 등 일방적인 관점을 가급적 배제하려 노력했다. 이에 대해 당시 편찬위원회 위원이었던 프랑수아는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이고 나쁜 놈이라고 몰아붙였으면 작업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다. 어떤 역사에든 빛과 그림자가 있다. 우리에게 멋진 역사가 주변국에는 고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프랑스 대혁명이나 나폴레옹 시절 우리는 주변 국가를 괴롭혔다. 각자가 자신의 어두운 역사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공동 역사교과서 작업이 가능한 것이다.’라고 협력 작업의 기본정신에 대해 술회했다. 이에 대해 평화주의와 교차적 접근-다자적 시각-이 기저에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역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교과서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이 다자적 관점과 상호존중, 역지사지의 중요한 가치를 배움으로써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것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 책에는 그런 중요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역사교과서보다 다양한 도표, 삽화, 이미지가 이용되어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이 이해가 쉽도록 제작된 점과 역사적 당사자들의 말을 시의 적절하게 인용하여 보다 사실감 있는 역사서로 보이도록 만든 점은 큰 장점이다. 또한 국내 교과서가 가진 어쩔 수 없는 세계사적인 서술의 한계를 이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는 훌륭히 매워줄 것으로 기대되며 일반인을 위한 교양서로도 그 역할을 훌륭히 해 낼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한계점도 가지고 있는 데 여전히 유럽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시각은 비서방 국가들이 성장해감에 따라 큰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이는 데 유럽에서는 아직도 많은 학자들과 그들의 저술들이 이런 관점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 하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전체적으로 역사 속에서의 독일과 프랑스의 역할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유럽적으로 해석한 점은 지금까지 여느 세계사와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이 언제까지나 이런 유럽 중심주의를 고수하고 알을 깨고 나오지 않는다면 차후 세계무대에서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나는 이런 역사저작물을 대할 때마다 그런 점에 유념하여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읽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문제를 두고 인터뷰에서 보인 자크 시라크의 이중적 관점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터키가 유럽에 기울어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아시아로 기울어 유럽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 유럽에 보다 이익이 된다.’고 말하면서도 ‘터키의 문화와 종교를 유럽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식으로 사물을 보아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보다 인간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고 아시아에 대한 편견 섞인 대답을 내 놓은 그가 ‘인간적인 시각’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는 것을 보니 아직 서방국가가 비서방국가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한지를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이 연합의 통합능력을 생각해 볼 때 힘에 부친다.’며 동반자적 관계를 제안했다. 그 통합능력이라는 것은 터키의 경제적 잠재력이 연합 내부에 미칠 파장을 고려한 것으로 유럽연합의 경제적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하고 있음을 내 비쳤다. 평화와 공존을 말하면서도 유럽의 경쟁우위를 지키기 위해 잠재력 있는 국가를 포용하지 못 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 정신이 그만큼 성숙되지 못 했나 보다.

  2차 세계대전 후 앙숙이었던 독일과 프랑스는 극적으로 화해를 했지만 진정으로 이웃처럼 가까워진 것은 이 공동 교과서가 나오고 나서 일 것이다. 여기서 한·일 관계를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화해는 불가능한 것인가?

  독일은 전후 공식적인 사과로 상대의 용서를 구했고 당사국은 이에 응해 용서를 했다. 그 이후 독일의 행보는 떳떳했으며 오늘날처럼 진정한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일본은 아직도 강경우익세력의 발언이 한국과 중국을 자극하고 있으며 상호존중과 동반자의 관계로 가기까지는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일본에서도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가 곧 번역돼 출간된다고 하며 한·중·일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미래를 여는 역사>가 이미 출간된 것을 보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민간의 활동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 봐도 좋지 않을까. 정치권에서 되지 않는다면 독일과 프랑스처럼 우리도 민간차원에서 꾸준히 시도하여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당당히 요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일본도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국제 사회에서 현재의 위치를 고수할 수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시 우방국이었던 독일조차도 일본의 그런 태도-용서를 구하지 않거나 역사교과서를 자의적으로 개정하는-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의 양심 있는 지식인들은 물론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영국의 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것은 과거와 미래의 대화이다. 역사란 역사가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시대상을 반영하고 역사 해석은 분변의 객관적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그 사실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에서 절대자는 과거나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쪽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는 미래에 있다.'라고 말했다.

  이번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채 되지 못한 시점인 지금 교과부에서 역사교과서를 수정하겠다고 들고 나왔다. 교과서포럼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31개 항목 56개 표현에서 좌편향돼 있다."며 "내년도에 발행되는 개정판에 수정될 수 있도록 교과부에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에 뒤질세라 정부부처도 나섰다. 통일부는 교과서 6종의 58개 부분을 수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국방부도 가세했으며 상공회의소와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마저 역사교과서의 수정에 동조하고 나섰다. 집권당인 한나라당 마저 다음 학기부터 개편 교과서를 사용하자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와 교사들, 교육·역사관련 단체들이 검인정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어느 쪽 주장이 진실일까? 정답은 개개인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Carr의 주장대로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진실은 다를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다. 분명한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현 정권의 집권이 영속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준엄하게 내려질 것이다. 위정자들이 그 점을 알아줬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자유지만 현실까지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정치를 하려 하면 더 큰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확대 해석하는 역사 왜곡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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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뎐 - 시대를 풍미한 검은 중독의 문화사
양세욱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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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취업난으로 이력서 쓰기의 중요성이 새삼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이력서에는 한 사람의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가 한눈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허투루 여길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서류이다. <짜장면뎐>은 그 이력서로 시작하고 있다.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음식인 '짜장면'으로 되어있지만 말이다. 짜장면이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한 눈에 알 수 있었지만 종이 한 장으로 어떻게 짜장면生을 다 알 수 있으리오.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면 당장 '일본'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애증이 깊다는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서쪽에 있는 중국도 그에 만만치 않다고 하면 과장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중국을 모르고 있는지를 <짜장면뎐>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지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실수가 많다. 그것이 오해와 편견에서 기인한 것이든 무지로 인한 것이든 말이다. 짜장면도 예외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국 산동성 태생인 '짜장면'이 한국으로 넘어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추정하기로 100년이 갓 넘은 짜장면의 역사가 한국문화사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중국에는 없는 음식이라는 오해, 짜장면의 원류, 음식명에 이르기까지 근거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특히 음식은 생물로서의 인간 본능적인 욕구이기에 한중일 삼국의 교류는 활발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크로스오버적인 음식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음식은 단순히 먹는 차원을 넘어 문화와 역사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짜장면'은 한국 화교의 희비가 교차하는 역사이자 피땀 어린 한국 근대사이기도 하다. 구한말 청국 상인들이 조차지인 제물포에 터를 닦음으로써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여 한 때 중흥하기도 했으나 1970년대의 박해로 말미암아 일본과 미국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을 맞기도 했다.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되어버린 강토에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무릎을 꿇는 대신 피와 땀을 땅에 뿌리는 것을 택했다. 짜장면은 그렇게 희노애락을 한중 양국인과 함께 나눴다.
 
시간은 흘러 다양한 외식문화가 유입되었지만 짜장면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때로는 질책을 듣기도 했지만 TV, 브라운관, 출판물 등에서 가장 정겨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TV에서 피자를 먹는 모습을 보고 군침을 삼키는 경우보다 짜장면을 먹는 모습에 회를 동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 그 점을 반증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오랜 시간 한국인과 함께 한 추억이 고스런히 서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맛보다 추억을 먹기 위해 짜장면을 주문하는 사람이 더 늘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을 보면 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짜장면뎐>을 덮을 때쯤 저자는 '짜장면'이 한국 화교의 희망과 눈물이, 어머니의 희생과 애정이, 할아버지의 피땀이 배인 한중문화교류의 첨병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중 양국은 오랫동안 같이 했지만 평화와 공존보다는 경쟁과 오욕의 역사가 더 많았다. 한국인이 중국인을 더 이상 '짱꼴라'로 부르지 않기를, 중국인이 한국인을 더 이상 '까오리빵쯔'로 부르지 않기를, 중국식당에 국적 불명의 음식이 아닌 제대로 된 중국음식이 존재하기를, 양국이 진정으로 악수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더 나아가 동북아 3국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수 개월 전 KBS [다큐멘터리 3일]에서 대구 화교를 소재로 다룬 적이 있었다. 또한 최근에는 중국식당의 위생 상태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도 있다. 그렇게 지금의 짜장면은 나에게 두 얼굴을 한 채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짜장면을 먹은 때가 언제인지 기억이 희미하다. 먹고는 싶은 데 불결함이 떠올라 참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먹고 싶은 것을 보면 다른 어떤 음식보다 참기 힘든 유혹을 가진 음식임에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을 통해 얻게 된 나의 소원은 단 한 가지다. 바로 짜장면을 보면 행복했던 '추억'만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몇몇 오타와 오류가 눈에 띄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황해'라는 용어 사용에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황해'를 '서해'로 부르고 표기해왔다. 물론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입장을 고려한 '황해'를 더 많이 사용하지만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고려해 병행 표기하는 곳이 늘고 있다. 동해/일본해 병행 표기처럼 말이다. 구글 어스도 그런 입장을 표명했다. '서해'라는 용어가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용 연혁이 고려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면 '황해'는 우리가 사용해야 할 용어는 아닌 것 같다. 바다 용어 때문에 양국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주체성이 훼손되는 것은 더 바라지 않는다. <짜장면뎐>에서 '서해'는 248쪽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다. 저자가 '서해' 대신 '황해'를 사용한 것에 다른 의미가 있지는 않겠지만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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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 No Boys, No Cr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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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의 하정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츠마부시 사토시.
한일 양국의 젊은 배우층의 아이콘이라 불려도 될 두 사람의 만남은 영화 개봉 전부터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고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영화의 소재와 스케일도 괜찮았다. 한일 양국 검은 조직의 마약 밀거래, 바다를 넘나드는 해양 액션 그리고 두 남자의 만남. 합격점에 든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니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졸작’이란 이름으로 남게 됐다.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되는 대로 살아온 형구, 문제 있는 가족을 책임졌지만 역시 막 살아가는 토오루.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서로 동질감을 느끼며 의기 투합하여 일을 낸다. 그리곤 마약 밀거래 조직과의 사투, 해양 액션, 우정과 가족애........... 등이 따라올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설피 배운 한국말로 더듬거리는 토오루, 나레이션으로 영화를 진행하려는 형구, 너무나 이질적이고 튀는 복장과 언행의 지수 등 무엇 하나 자연스레 영화에 흡수되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관객을 배려한 것은 간간히 ’피식’ 하고 웃음을 짓게 하는 몇몇 장면들 정도.

시나리오는 있었지만 스토리는 없었다. 배우는 있었지만 캐릭터는 없었다. 보는 내내 생각한 것은 ’대체 무얼 보라는 것이며 무얼 말하고자 함인가’에 대한 것 뿐. 추가하자면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다.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보트>에는 연출이라는 게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배우에게 대본을 주고 알아서 연기하라고 했으면 최소한 이보다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일관성 없는 영화는 보는 내내 집중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설마 이런 것이 김영남 감독이 노린 점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치닫으며 조그만 반전-스토리상의-을 노리는 듯 보였다. 늦게 나마 방향을 잡고 반격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뿔싸! 그대로 끝나버린 것이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 뒤로 더 이상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2부를 제작할 생각인가? 나라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말릴 일이다.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닐테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말을 만들었단 말인가. 정말 뒤통수를 제대로 치는 반전-이런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영화를 찍다 말았나? 제작비 부족 등의 이유로?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영화 제작에 문제가 있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차라리 개봉을 연기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풀어놓은 사건은 많았지만 제대로 수습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열어놓고 봉합을 하지 않으니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뿐.

최고가 될 수 있는 두 배우를 수렁에 처넣었다는 느낌이다. 그 둘을 데리고 겨우 이 정도 밖에 만들 수 없었단 말인가. 아마추어 영화제에서도 이런 영화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정우와 츠마부시 사토시라는 이름과 한일 양국을 넘나드는 해양 액션이라는 광고만 보고 귀한 돈을 들여 극장에 갈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길 바란다는 말을 전한다. 광고는 광고일 뿐.

괜찮은 소재와 훌륭한 배우로 출발한 영화 <보트>는 힘차게 출발했으나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격랑에 난파된 후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다 끝내 침몰하고 말았다.


덧붙임 : 하정우, 그는 이름만 믿고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배우가 아직은 될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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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트 (No Boy No Cry, 2009)
    from 진사야의 비주얼 다이어리 2009-05-29 07:58 
    무거운 물주머니처럼, 건조한 청춘영화밀수품 심부름을 하는 청춘(형구)과 그 청춘을 감시해야 하는 청춘(토오루), 이 두 청춘에 어쩌다 엮이고 만 청춘(지수). 단 29회차라는 짧은 촬영 기간 동안 카메라에 담기고, 중간 과정을 거쳐 관객들 앞에 선을 보인 김영남 감독의 신작 에서 획득할 수 있는 단편적인 이미지다. 앞의 몇 문장에서 암시했지만 는 공개된 포스터와 시놉시스에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는 요상한 한...
 
 
 


101번째 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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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넥션 (살림) /  제임스 버크(저자)
위기의 시대이다. 인류사를 돌아보면 위기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의미하며, 이 도전을 이겨낼 때 개인과 국가, 더 나아가 문명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토인비는 문명의 흥망성쇠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키워드로 이해했고, 조지프 슘페터는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기업가의 “혁신Innovation”을 주목했다. 우리의 질문은 이렇다. 그렇다면 이 비약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과학기술의 역사를 다시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기술의 역사야말로 끝없는 혁신과 비약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버크는 우리의 문명을 만들고 변화시킨 기술적 요소들이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뿌리를 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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