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 - 1945년 이후 유럽과 세계
페터 가이스 외 지음, 김승렬 외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9월
평점 :
2008년 7월 한동안 잠잠하던 일본은 또다시 독도 영유권에 대한 망발로 대한민국을 도발하여 들끓게 만들었다. 이어 교과서에 ‘다케시마는 일본의 영토이고 한국이 무단점령하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겠다고 밝혀 논란을 확산시켰다.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동해의 일본해 단독표기서부터 일본 극우 단체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개정판 중학교 역사·공민 교과서에 일제의 조선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역사 왜곡 내용을 포함시키는 등 서로 입장이 너무도 달라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한국과 일본. 이 두 나라에 역사의 경계선 넘기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수천 년 전부터 우리와 역사적으로 맞물려 온 중국의 경우는 어떤가.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작업을 통해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통해 우리를 자극하여 불쾌함을 조성하는 그들과의 공존은 가능한 것인가?
한·중·일, 동북아시아 3국의 화해와 평화는 언제쯤 가능할까? 그 점을 살펴보기 위해 무대를 서유럽으로 돌려보자. 그곳에도 오랫동안 앙숙 관계에 놓였던 두 나라가 있었다. 바로 독일과 프랑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나폴레옹의 독일연방 침략에서부터 시작하여 히틀러의 프랑스 점령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 간 두 나라는 네 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룬 숙적이었다. 그것도 오래된 역사가 아닌 최근의 근·현대사였으니 그들은 서로 불신과 증오로 얼룩진 관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또한 양측의 역사교과서는 서로의 입장에서 상대를 비판하거나 심하면 비난을 하는 등 문제가 많을 것으로 짐작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라는 책을 통해 중등교육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일선에서 가르치는 역사교과서를 공동으로 제작한다는 것은 협력·공존·평화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무엇이 불신과 증오로 얼룩져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두 나라를 화해와 공존의 길로 걸어가게 했을까?
바로 답은 ‘민간’에게 있었다. 책에 따르면 1930년 전후 프랑스 역사교육계의 선각자들로부터 시작된 양국의 관계 개선에 대한 노력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 평화주의를 지향해 마침내 독일 역사교육계의 참여를 끌어내었고 수십 년 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실이란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의 출간과 교육이다. 오랜 민간의 노력과 더불어 독·프 청소년의회의 요청에 두 나라 정상이 수락을 하여 결국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앞장섬과 배우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교과서를 스스로 만들려는 노력과 열린 정신에 그야말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하면서도 양국의 집필진이 교차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는 등 일방적인 관점을 가급적 배제하려 노력했다. 이에 대해 당시 편찬위원회 위원이었던 프랑수아는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이고 나쁜 놈이라고 몰아붙였으면 작업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다. 어떤 역사에든 빛과 그림자가 있다. 우리에게 멋진 역사가 주변국에는 고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프랑스 대혁명이나 나폴레옹 시절 우리는 주변 국가를 괴롭혔다. 각자가 자신의 어두운 역사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공동 역사교과서 작업이 가능한 것이다.’라고 협력 작업의 기본정신에 대해 술회했다. 이에 대해 평화주의와 교차적 접근-다자적 시각-이 기저에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역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교과서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이 다자적 관점과 상호존중, 역지사지의 중요한 가치를 배움으로써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것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 책에는 그런 중요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역사교과서보다 다양한 도표, 삽화, 이미지가 이용되어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이 이해가 쉽도록 제작된 점과 역사적 당사자들의 말을 시의 적절하게 인용하여 보다 사실감 있는 역사서로 보이도록 만든 점은 큰 장점이다. 또한 국내 교과서가 가진 어쩔 수 없는 세계사적인 서술의 한계를 이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는 훌륭히 매워줄 것으로 기대되며 일반인을 위한 교양서로도 그 역할을 훌륭히 해 낼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한계점도 가지고 있는 데 여전히 유럽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시각은 비서방 국가들이 성장해감에 따라 큰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이는 데 유럽에서는 아직도 많은 학자들과 그들의 저술들이 이런 관점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 하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전체적으로 역사 속에서의 독일과 프랑스의 역할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유럽적으로 해석한 점은 지금까지 여느 세계사와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이 언제까지나 이런 유럽 중심주의를 고수하고 알을 깨고 나오지 않는다면 차후 세계무대에서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나는 이런 역사저작물을 대할 때마다 그런 점에 유념하여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읽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문제를 두고 인터뷰에서 보인 자크 시라크의 이중적 관점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터키가 유럽에 기울어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아시아로 기울어 유럽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 유럽에 보다 이익이 된다.’고 말하면서도 ‘터키의 문화와 종교를 유럽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식으로 사물을 보아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보다 인간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고 아시아에 대한 편견 섞인 대답을 내 놓은 그가 ‘인간적인 시각’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는 것을 보니 아직 서방국가가 비서방국가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한지를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이 연합의 통합능력을 생각해 볼 때 힘에 부친다.’며 동반자적 관계를 제안했다. 그 통합능력이라는 것은 터키의 경제적 잠재력이 연합 내부에 미칠 파장을 고려한 것으로 유럽연합의 경제적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하고 있음을 내 비쳤다. 평화와 공존을 말하면서도 유럽의 경쟁우위를 지키기 위해 잠재력 있는 국가를 포용하지 못 하는 그들을 보니 아직 정신이 그만큼 성숙되지 못 했나 보다.
2차 세계대전 후 앙숙이었던 독일과 프랑스는 극적으로 화해를 했지만 진정으로 이웃처럼 가까워진 것은 이 공동 교과서가 나오고 나서 일 것이다. 여기서 한·일 관계를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화해는 불가능한 것인가?
독일은 전후 공식적인 사과로 상대의 용서를 구했고 당사국은 이에 응해 용서를 했다. 그 이후 독일의 행보는 떳떳했으며 오늘날처럼 진정한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일본은 아직도 강경우익세력의 발언이 한국과 중국을 자극하고 있으며 상호존중과 동반자의 관계로 가기까지는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일본에서도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가 곧 번역돼 출간된다고 하며 한·중·일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미래를 여는 역사>가 이미 출간된 것을 보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민간의 활동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 봐도 좋지 않을까. 정치권에서 되지 않는다면 독일과 프랑스처럼 우리도 민간차원에서 꾸준히 시도하여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당당히 요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일본도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국제 사회에서 현재의 위치를 고수할 수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시 우방국이었던 독일조차도 일본의 그런 태도-용서를 구하지 않거나 역사교과서를 자의적으로 개정하는-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의 양심 있는 지식인들은 물론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영국의 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것은 과거와 미래의 대화이다. 역사란 역사가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시대상을 반영하고 역사 해석은 분변의 객관적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그 사실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에서 절대자는 과거나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쪽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는 미래에 있다.'라고 말했다.
이번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채 되지 못한 시점인 지금 교과부에서 역사교과서를 수정하겠다고 들고 나왔다. 교과서포럼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31개 항목 56개 표현에서 좌편향돼 있다."며 "내년도에 발행되는 개정판에 수정될 수 있도록 교과부에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에 뒤질세라 정부부처도 나섰다. 통일부는 교과서 6종의 58개 부분을 수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국방부도 가세했으며 상공회의소와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마저 역사교과서의 수정에 동조하고 나섰다. 집권당인 한나라당 마저 다음 학기부터 개편 교과서를 사용하자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와 교사들, 교육·역사관련 단체들이 검인정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어느 쪽 주장이 진실일까? 정답은 개개인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Carr의 주장대로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진실은 다를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다. 분명한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현 정권의 집권이 영속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준엄하게 내려질 것이다. 위정자들이 그 점을 알아줬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자유지만 현실까지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정치를 하려 하면 더 큰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확대 해석하는 역사 왜곡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