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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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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비안 총기 난사 사건 가해자의 엄마가 

아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모성애와 발버둥치며 치열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 치열함만큼 끓어오르는 아들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해자의 가족인 것처럼 끔찍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 가족은 어떻게 생존해 나갈 것인가가

고통을 헤집고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어떤 극단적인 전형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늘, 내 관심을 끌곤 했다.


읽는 내내 마음을 헤집는 것처럼 아팠다.

저자의 슬픔에 깊이 동조하면서도

저자가 결국 잔혹한 가해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아들을 혹시나 비호하고 있지 않는지 무섭게 감시하는 내 눈이 보여서.

늘 비난할 준비가 돼 있는 내 자세가 또한 놀랍고 차갑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모두 알고 받아들이면서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저자의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

힘들었다.


다 읽고 나면 사람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오래 같이 살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우리가 다른 존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불성설인지.

누군가가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겸허해진다.

함부로 누군가에게 했던 분석과 투사가 부끄러워 지기도 한다.


그래도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게 인간이겠지.

그런 게 사랑일 수도 있고.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어서 일부러 무엇이라 규정하기도 하고.

그런 게 인간의 한없이 약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면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은

그 무엇으로도 정의 내릴 수 없어 배신감마저 드는 사람의 마음에 정말 가닿고 싶어서 

들끓는 애정으로 끊임없이 부딪히고 또 부딪히며 여기저기 생체기를 입지만,

그럼에도 한 발자국을 더 내딛는 인간의 사랑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랑은 어떤 형태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거 같다.

결국 이 책에서 최종적으로 보이는 건 아들에 대한 엄마의 어쩔 수 없이 심원하고 뜨거운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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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한 과학
토머스 루이스 외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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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문을 읽었을 때, 다음 문구가 마음을 끌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지성과 감성이 충돌하는 경우, 보다 지혜로운 쪽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것이다. 지성의 오른팔이었던 과학이 과거를 청산하고 이 사실을 입증할 것이다. 태초부터 두뇌의 중요한 창조물이었던 감성은 거추장스러운 동물적 잔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해방시키는 열쇠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힘과 소리 없는 메시지 속에 잠겨 있다. 개인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행복은 사랑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게, 신비스럽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선회하는 은밀한 세계를 어느 정도 해독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언제나 마음의 격랑은 내게 과제였다.
마인드 콘트롤이란 말의 이면엔 이성의 전지전능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성이 마음을 콘트롤하지 못할 때, 나는 쉽게 나를 자책하곤 했다.
이 야생마 같은 마음은 진화상에서 포유류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는 이 책의 서술이 얼마나 나를 기쁘게 했는지 모른다.
하하.
'그래...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어!'

알 수 없는 예감을 존중하는 것,
마음이 이끄는 방향으로 무작정 따라 보는 것,
이런 말은 어쩌면 미신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과학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빛이 입자와 파동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것처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가 파면 팔 수록 오묘한 것처럼
모든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환상임을 과학의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다.

포유류가 뇌에 '변연계'라는 부분을 발달 시킴으로써,
포유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포유류는 '표정'으로 소통을 나누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야옹이들의 표정에서 느낀 감정이 야옹이들의 마음임을 이 책을 통해 자신있게 믿기 시작했다.)

또한, 과거의 어느 황제가 언어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갓 태어난 아기들을 의식주만 해결해주고 방치했을 때
(황제는 이러한 아기들이 내뱉는 첫번째 언어가 인류의 근원 언어임을 증명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아기들이 모두 죽어버린다.
이것은 변연계 공명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책은 말한다.
그리고 포유류에게 태어난 직후의 변연계 공명(마음을 나누고 따뜻함을 소통하는 것)이 생존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원숭이들의 호르몬 수치로 증명해낸다.
따듯함이 없으면 생존에 필요한 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저하 되었고, 결국 아기들은 마음의 죽음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아기가 태어났을 때
변연계 공명을 통해 일종의 심리적 경향성이 생긴다고 했다.
어떤 심리적 상황에 처하느냐에 따라,
불안정한 아이가 될 수 있고,
사랑을 이해하는 아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기를 잘 돌보고 사랑해야 하지만,
이런 주장은 여자(엄마)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곤 한다.
아기를 잘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처럼 거대한 죄책감은 없다.
모든 인간이 완벽한 사랑을 받고 자랄 수는 없는 것이 또한 통계적으로 증명된 현실이다.
그래서 언젠가 읽은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많은 심리학자들이 어린시절 환경 때문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만 연구해 왔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잘 자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런 사람들에대한 연구는 부족하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신의 은총'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그 책에서 종교 챕터를 시작한다.
참고로 스캇펙은 기독교신자다.
어쨌든 나는 그의 이런 질문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래서 나는 불우한 환경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한 사람들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삼분의 이 쯤 읽었을 때 기대했었다.
어렸을 때 변연계 공명이 부족했던 상처입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랑이 치유해 줄 수 있음을 증명해 주지 않을까... 하는.
만약 나의 기대를 이 책에서 과학적 근거로 증명해준다면
완전한 나의 완소 책이 될 뻔했다.
하지만 역시나 쉬운 길은 없다.
이 책은 그러한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매우 쉽지는 않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ㅜㅜ
그래서 책의 마지막 즈음엔 어렸을 때 아이를 잘 돌보는 사회적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며,
의사들이 환자에게 감정이입하지 않는 치료 방법이 유용하다는 현대의학의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흥분한 말투로 역설한다. 하하.

그래도 여전히 완소책이다.
나는 이제부터 나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기로 했다.
무언가를 재단하고 분리하는 이성은 존중하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지.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사실 막막하기도 하다.

왜 그런 걸까?
모든지 알면 알 수록
진리는 저너머에 있고, 때때로 모호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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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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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마구마구 추천을 날리고 있는 책이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런! 분이시란 것을 참으로 처음 알았다.

예전에 대학을 다닐 때,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교수님이 물었다.
나는 통일 비용, 사회 혼란 등, 통일은 해야 할 것 같은데 문제점이 더 많지 않나...
솔직히 그런 걱정이 많이 들었다.
그때 교수님이 우리나라만의 철학이 발전되기 위해선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 순간 아하! 하며 고개가 끄덕거려 졌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없다.
지난 20세기 냉전을 좌우했던 한 부분에 대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공산주의에 대한 터부때문에, 북한이 있기 때문에
삶의 기초를 쌓는 초중고등학교에서 제대로 장단점을 얘기할 수 없는,
절름발이 환경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철학이 나올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지금 한 부분이 구멍이 크게 뚫려 있는 것이다.
그 구멍을 알고 나서 부터, 처음으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태어났다면
나의 사고도 조금더 폭넓어지지 않을까, 상상해 보곤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나의 사고를 늦었지만 넓게 만들어 줬다.
세계 패권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의 추악한 뒷 모습도.
그리고 미국, 즉 자국의 이익을 위해
20세기에 수많은 독재 국가를 지원한 미국의 모습.
그리고 그 속에 우리 나라가 휩쓸린 과거의 역사들을
냉철한 지식인의 소화된 언어로 접할 수 있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만큼,
조국의 역사를 남의 나라 역사만큼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런 역사 교육이 일천하다.

통일이 되야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공기를 바꾸는 것이다.
누구는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누구는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누구는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그 속에서 삶의 방향을 다채롭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공기가 가득한 우리나라는 언제쯤 올까?

이렇게 냉철한 리영희 선생님 같은분이 역시 나의 이상형.
사실... 리영희 선생님의 부인이 더 대단하시다.
그 힘든 세월을 가난하게 견뎌내셨다니.
게다가 시위도 하다가 15일 구류도 살으셨다니. 하하.
가감없이 자신의 모자란 면을 정확한 언어로 서술하시는 리영희 선생님도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삶을 마주하는 고고한 선비같은 자세도 놀라웠고.

나는 그 시대(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학생 같은 거로 살아가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다.
지나치게 열심히 운동해서 고문 받으며 변절자가 되거나,
완전히 외면하고 살면서 마음엔 죄책감이 그득그득 쌓였거나.
그러지 않았을까?
어쨌든 두 길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ㅜㅜ

이번에 현대사 공부 제대로 했다.

우리는 윗세대들에게는 빚이 있다.
지금도 물론 더 교묘하고 만만치가 않아서 쉽지 않은 시기이지만.

리영희 선생님 오래오래 사셔야 하는데.

그리고 왜!
이러한 언론인은 안 나오는 거야?
흠... PD 수첩이 하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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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팰리스
폴 오스터 / 열린책들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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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를 만난건 스모크라는 영화에서 였다. 아니다 가끔씩 지인들에게 회자되던 이름으로 먼저 만났다. 폴 오스터라는 어감이 왠지 캐비어를 연상하게 해서, 궁금증이 일었는데, 친구가 넘겨준 책 <문 팰리스>에는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머리에 복잡한 책을 우겨넣고 있을 즈음, 스르륵 손이 <문 팰리스>로 갔다.

굳이 줄거리를 정리 해 보자면 정말 별 얘기가 없다. 한 고아로 자란 청년이 자기를 키워준 삼촌의 죽음으로 방랑을 하다, 사랑을 하다, 얘기치 않게 자신을 다시 찾게 된다는 그런 내용이다. 여기서 자신을 찾게 된다는 말에는 많은 함의가 담겨 있지만 이자리에서 구체적인 발설을 해 버리면 결국은,다는 아니지만, 소설의 커다란 맥을 쉽게 알게 되어 재미가 없게된다. 즉, 줄거리 자체로만 요약하자면 <문 팰리스>는 정말 별거 아닌 내용이다. 그냥 흔히 발에 치이고 치일 수 있는 고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폴 오스터는 그것을 예사롭지 않게 풀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가령 '난 오늘 배가 아파서 넘어졌어.'라는 말이 폴 오스터의 손을 거치면 너무 흥미진진해서 계속 재촉하게 되는 그런 것이 탄생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재미' 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환승구에 서서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때 왠지 모를 두근거림이 계속 아련하게 이어진다. 다른 하나의 심장을 심어준 거 같다.

<문 팰리스>는 현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속 깊은 곳에는 신화를 품고 있다. 한 영웅이 집을 떠나 여행을 하고 다시 제자리에 왔을 땐 예전의 그가 아니다. 그 잔혹하고도 흥미진진한 모험을 겪은 그는 이제 나선형 원을 그려서 같은 위치에 돌아왔지만 공간적으로는 전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서 버린 것이다. 즉 '성장'을 한 것이다. 폴 오스터는 '포그'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간들에게도 그런 '성장'의 의식이 알게 모르게 전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인간은 너무도 쉽게 고통을 고통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고통의 이면엔 어쩌면 다른 재미있는 것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위로는 아니지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이다.

책을 덮고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들어왔다.
또 다른 하나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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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한길그레이트북스 30
M.엘리아데 지음, 이은봉 옮김 / 한길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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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난 종교적 인간을 좋아한다. 종교적 인간은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성적으로 따지고 따져도 희망에 어떤 객관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좋은 날이 오겠지.' '잘 될 꺼야.' 하면서 믿을 뿐이다. 그래서 희망을 믿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분명 종교적 인간인 것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니, 약 0.0000000000001%만 빼 놓고는 인간이란 종 대부분이 다 '종교적'이 아닐까? 우리가 그렇게 흠모하는 이성이란 것의 역사도 르네상스 이후라고 치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인류가 탄생된 그 이전 시대에는 도대체 어떤 사고체계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을까?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매우 흥미 있는 책이다. 이성을 좋아하는 현대인이 쉽게 잊어버리는 사실, 즉 현대인은 종교적 인간의 후예라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 인간의 기질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저 어느 곳에 신이 있어서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는 것이 당연했던 그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어느 날 개혁을 거치면서 조금씩 변화해 왔다. 하지만 수 천년 동안의 종교적 몸짓은 암암리에 우리 행위와 삶 곳곳에 숨쉬고 있다는 것.그것은 '희망을 믿는다'는 말속에서도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신들의 세계가 저 멀리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세상을 둘러보면, 세상은 좀더 여러 층위로 보인다. 또 인연의 연줄을 타서 환생한다고 상상하면, 집착한 어떤 것을 이젠 좀더 쉽게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삶은 계속 반복될 것이므로. 종교적 인간의 시공간은 이처럼 다르다.

하지만 이처럼 다르니 종교를 갖지 않는 현대인들이여 종교를 갖고 믿어라 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그렇지만 엘리아데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聖現을 믿는다는 것이다. 성스러움이 세상의 곳곳에서 인간에게 읽혀진다는 것. 이 성현이란 것은 파란 하늘의 심원함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신이 있다면 저 땅 속 깊은 곳이 아닌 하늘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하늘의 푸름에 어떤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밤하늘에 무수히 깔린 별들을 좋아한다. 단순한 반짝임 때문은 아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내 속에 있는 '믿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나도 어쩔 수 없는 종교적 인간의 후예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왜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는지도 이해가 간다. 당시의 종교는 오히려 미신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는 또 어떤가? 지나친 이성의 잣대로 매겨진 세상은 오염이 그득하고, 저마다 메마른 입술로 삶을 겨우 꾸려나가고 있다. 그들에게 자연은 탄소 화합물의 조합일 뿐이고 이익을 추려낼 자원 보관소일 뿐이다.

문득 <성과 속>은 현대의 비종교적인 인간들에게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가 종교인이 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꽃, 파란 하늘, 저녁 노을, 변화 무쌍한 달을 바라보며 느꼈던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감정들을 쑤욱 들여다보면, 나도 세상을 이성의 잣대로만 바라 본 것이 아니라는 것, 풀 냄새를 맡으며 알게 모르게 신비에 취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지 않을까? 세상은 내가 알 수 없는, 하지만 언뜻 맡을 수 있는 신비로 가득 차 있다.

내 속에서 믿음을 갖는 인간이 다시 태어났다. 그 인간은 이 지구라는 행성을 좀더 귀중히 여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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