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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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강남순 교수님으로 인해 알게 된 학자다. 그 후 그는 나의 삶과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책을 직접 읽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의 사유세계를 알 수 있었다. ‘악의 평범성,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 생성/탄생의 철학자’ 등 그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의 글에서 활용됐다. 독서를 하며 그의 흔적을 마주할 때마다, 그의 책을 직접 읽고 싶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으며, 그의 사상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어 쉽게 책을 시작할 수 없었다. 2020년이 돼서야 비로소 그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생전 인터뷰를 담은 <한나 아렌트의 말>로 그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학문세계를 모두 알지 못하지만, 이 책은 그의 학문 세계에 대한 개괄을 담는 것 같다. 특히 이번에 읽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그의 생생한 진술을 들을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만약 이 책을 읽지 못했다면, 그의 경고한 것과 같은 잘못된 해석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다루며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핍박의 역사를 샅샅이 알리는 책이었다. 박물관에서 알 수 없었던, 피의자들의 생각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방식으로 유대인을 핍박했는지. 또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해석은 나와 사회를 되돌아보게 했다. 개인이 얼마나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인지. 인간이 사회에서 어떠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 나치의 만행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나와 연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렌트의 해석은 이 만행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개인들을 연결 짓는다.

악의 평범성.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누구나 악을 자행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해, 잘못 및 범죄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의 평범성은 행위의 주체보다 행위에 초점을 둔 개념이다. 즉, 평범해 보이는 행위가 ‘악의 자행’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대인을 적극적으로 핍박했던 것처럼, 그는 이 행위를 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치 당원으로서 이 일을 그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총통의 말이 법이었던 시절에, 그 법을 지키는 것이 정상이었고 옳은 것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행위였다. 하지만 아렌트는 우리가 평범하게 하는 행위 역시 악이 될 수 있다는 걸 강조한다. 사고의 부재는 그 행위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사고의 부재의 위험성을 알리며 적극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적극적으로 사고하기란 쉽지 않다. 일상에는 지극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개인 역시 다양한 삶을 꾸려나간다. 인간에겐 매 순간 생각하고 의문을 던지는 것보다 이에 적응하는 삶이 더욱 익숙하다. 반면에 적극적 사고란 평범성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행위다. 적극적 사고를 통해 인간은 표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을 살필 수 있다. 이는 외부 세계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개인은 적극적 사고를 통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정당화하는지,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등을 깨닫게 된다. 적극적 사고의 부재는 평범해 보이는 것들에 권위를 부여하며, 그것이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만든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더라도 평범성의 이름으로는 어떠한 문제로도 읽히지 않는다.

그가 끝까지 열렬히 믿은 것은 성공이었고, 이것이 그가 알고 있던 ‘좋은 사회’의 주된 기준이었다. 히틀러 (그와 그의 동지 자센이 자신들의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를 원한 사람)에 관한 주제에 대해 그가 한 마지막 말은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히틀러가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의 성공만으로 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층분한 증거가 됩니다." 그는 자기 가 그랬던 것처럼 그 ‘좋은 사회’가 모든 곳에서 열정과 열성을 가지고 반응하는 것을 보았을 때 사실상 그의 양심은 휴식상태에 있었다. 판결 문에 나오는 말처럼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가까이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양심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주변에 있는 사회의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더불어 말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권력을 유지 수단으로 ‘인간의 사고 부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았던 것 같다. 그가 사용한 언어 규칙과 국민들의 사고를 개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은 인간을 하찮은 존재로 만든다. 인간은 규정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그 환경을 개혁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하지만 히틀러에겐 국민들이 자신의 정책에 반감을 갖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전체주의 교육의 목적이 국민들이 어떠한 정치적 신념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에 깊이 공감된다. 또한 언어 규칙은 그들이 행하는 폭력의 잔인성을 가려준다. 최종 해결책, 특별한 치료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계획, 캠프는 수용소, 샤워는 가스 살포 등과 같이 범죄를 일상적인 언어로 유화시키고 있다. 유화된 폭력의 언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폭력의 심각성을 경시하게 하고, 행위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나치의 만행을 들을 때마다,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상황이 상상이 된다.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행위들이 나치의 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영화 말모이에서 한국의 아이가 일본 순사에게 부딪혔을 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스미마셍”을 말했던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가 담겨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언어를 빼앗고 그들의 언어를 주입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을 의도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어를 통해 그들의 사고체계, 문화를 습득함으로써 일본이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사고가 부재된 국민으로 나아가기를 원했을 것이다. 일본이 펼친 일본어 정책은 나치의 독특한 언어 규칙이 어떻게 국민들의 사고를 조정하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언어 규칙이 고안된 또 다른 이유가 무엇 이건 간에 그 규칙은 이 문제 처리에 본질적이었던 아주 다양한 많은 협조 체제를 이루어 갈 때 질서와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더욱이 ‘언어규칙 (sprachregulung)이란 용어 자체가 암호였다. 그 말은 일상어로는 거짓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지칭할 수 있었다. ‘비밀을 가진 자가 (스위스에서 파견된 국제적십자 사 대표들에게 테레지엔슈타트를 보여주기 위해 아이히만이 파송되었을 때처럼) 외부에서 은 사람을 만날 때 명령과 더불어 ‘언어 규칙'을 받았다.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선, 외부에서만 공격을 해선 안 된다. 완벽하고 철저하게 파괴하기 위해선 내부의 균열이 반드시 필요하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단결을 견고히 할 뿐이다. 독일과 일본은 이러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엔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핍박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 수 있다. 유대인 위원회를 만들어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동족을 핍박하도록 이끌었다. 유대인 위원회는 부여된 특권에 취해, 나치 독일의 적극적인 동조자 역할을 한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친일파들 역시 사리사욕에 취해 같은 민족을 핍박하는 것에 어떠한 문제점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문제적 상황을 견고히 하는 유용한 도구로써 사용됐다. 이는 주체성을 포기한 행위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부다페스트 위원회의 첫 번째 성명서에는, "유대인 중앙위원회는 모든 유대인의 정신적, 물질적 부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유대인의 인력에 대해서 처분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우리는 유대인 관리들이 살인의 도구가 되었을 때 (자신의 배가 침몰할 때 갖고 있던 화물들을 바다로 던져버리고 배를 안전하게 항구로 성공적으로 운항한 선장들처럼, ‘100명의 회생자를 내고 1000 명을 구한, 1000명을 회생시키고 1만 명을 구한 구원자들처럼)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를 알고 있다. 진실은 더욱 끔찍했다.

베를린의 유대인 핍박의 흔적과 아렌트의 책을 짚어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면서 위험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프락시스의 존재로서 인간은 주체성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 주체성을 포기하고 사고를 멈출 때, 우리의 행위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 또한 나 역시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칸트의 말처럼 나의 행위가 보편 법칙에 합당한지를 지속적으로 따질 수 있는 ‘입법자’로서 살아가고 싶다. 익숙함에 취해 문제를 문제로 바라보지 못하는 ‘나약한 나’가 되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공부해야겠지.

전체주의 지배체제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사실 들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망각이라는 구멍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42년 6월 이래로 있었던 대량학살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소란스러웠던 시도들(화장을 통해, 구덩이를 파서 시체들을 불태움으로써, 폭약과 화염방사기와 뼈를 갈아버리는 기계들을 이용한 시도들)이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적들이 ‘완전한 익명 속에서 사라져버리도록’ 한 모든 노력들은 허사였다. 망각의 구멍 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아니다. 만일 그러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진다면, 이는 오늘의 독일을 위해서, 단 지 독일의 해외에서의 위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슬프게도 혼란스러운 내면적 조건을 위해서도 실질적으로 아주 유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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