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식탁 -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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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원피스엔 패기가 등장한다. 패기의 종류는 다양하다. 견문색, 무장색, 패왕색 패기가 있다. 견문색 패기는 상대의 속도 및 거리와 상관없이 그들의 기척을 읽는 능력을 말한다. 무장색 패기는 기를 통해 보이지 않는 갑옷을 만들어 방어를 하거나, 더욱 강력한 공격을 가능케 한다. 마지막으로 왕의 자질을 일컫는 패왕색 패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기로써 상대방을 제압하는 능력이다. 이 세 패기는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 문득 '정치적인'이라는 형용사가 원피스의 패기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정치적 행위를 말할 때, 명확하게 의도나 목적이 드러나 있는 행위를 말하지 않는다. 이면에 어떠한 의도를 품고 있는 행위를 정치적인 행위라고 부른다. 인간은 정치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나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달한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에게 전달된다. 상대는 정치적인 행위와 마주했을 때, 그 의도를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지만 못 알아차리는 경우도 많다. 전자의 경우 그 의도대로 행위를 하거나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 은밀하게 상대의 행위 및 생각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정치적 의도는 상대의 행위에 지속적으로 스며든다. 이는 행위 주체가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정치적 의도를 내면화하는 결과를 낳으며 그가 의도한 대로 행동하게 된다.

사실 인간 살이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하든 그 행위엔 의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행위의 의도가 오로지 한 가지만 있는 경우도 드물다. 명확히 의도가 보이는 행위 역시 그 이면에 다른 의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적 의도는 행위 주체에게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의도 없이 한 행위 역시 상대에겐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왜? 인간은 다양한 결과 다층적인 권력 구조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의 권력 구조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 한국인, 아시아인, 교대 남자, 키 184cm 사람,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 지방 사람. 등 나를 어떻게 범주화하냐에 따라 나의 권력 구조는 달라진다. 항상 개인이 권력자일 수도 없고, 피권력자일 수도 없는 이유다. 나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상대방이 나와 그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냐에 따라 내 행위의 의미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주체가 행위 한 후에, 그 행위는 주체의 품을 떠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상대방의 의도와 달리 행위를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인간으로서의 특권이자 의무다. 같은 대상을 봐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며 해석한다. 어떤 프레임과 함께 보느냐에 따라서도 같은 행위가 달리 보이기도 한다. 정치적인 식탁은 이러한 해석 행위가 가득한 책이었다. 작가 이라영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음식을 소재로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음식은 먹는 것을 넘는 존재가 된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볼 때, 그 이면의 정치적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 또한 본래는 정치적 의도가 없었더라도, 어떻게 상대에게 정치적으로 다가오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음식을 낯설게 보려는 이라영의 노력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대부분의 음식을 성별 프레임으로 해석하려 해,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가 음식을 통해 서로 다른 성별 간의 권력 구조를 고발하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이 작업이 항상 같은 구조를 보여 아쉬웠다. 단편적인 글마다 큰 주제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담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또는 하나의 생각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해석을 끌고 갔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다. 하나의 현상을 깊이 있게 여러 장에 걸쳐서 이야기했다면, 독자에게 더욱 오래 남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하나의 권력 구조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남자일 땐 다른 성별에 비해 권력이 높을 수 있다. 내가 대졸자일 때 고졸자에 비해 취업에서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아시아인일 때 나는 백인 및 다른 인종에 비해 힘이 없어진다. 내가 지방에 살 땐, 서울에 사는 사람들 보다 문화 권력 역시 낮아진다. 이렇듯 우리의 권력 구조는 다층적이며, 가변적이다. 하나의 권력 구조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것은 하나의 구멍으로 벽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하나의 구멍에서 볼 수 있는 세계는 제한적이다. 다른 쪽 면이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다른 구멍을 바라볼 수 있는 자세와 다른 구멍들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가 없다면 하나의 구멍에서만 본 세상을 진리라고 생각하며, 다른 구멍들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위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아무리 복잡하게 봐도 세상을 모두 볼 순 없다. 단순화의 작업이 세상의 두드러진 특징을 잡아낼 수 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소외되고 만다. '소외'는 폭력을 낳는다. 세상을 단순하게 보는 것도 좋지만, 내가 갖고 있는 연장 도구를 최대한으로 활용해 복잡하게 바라보는 건 어떨까? 이게 낯설게 보기의 시작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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