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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받을 권리 - 팬데믹 시대, 역사학자의 병상일기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강우성 옮김 / 엘리 / 2021년 6월
평점 :
병상일기에서 쓴 자유에 관한 고찰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여러 책을 읽다 보면 책과 책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점을 찍어 연결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치료받을 권리』를 집필한 티머시 스나이더는 병상에서 평생 읽고 연구한 책을 기억하며 서로의 유기적인 관계를 쉴 새 없이 연결합니다. 때로는 과거로, 현재를 오가며, 과거로부터 현재를 보고, 현재로부터 과거를 되짚습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병상일기라는 걸 쓸 마음의 여유마저 사치로 다가올 수 있겠지요.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치료받을 권리』를 쓴 작가는 저명한 역사학자니, 럭셔리한 특급 병실에 누워 맥북 프로에 병상일기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넘겨짚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는 길거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일반인의 위치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병원 치료를 받기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의 부조리한 의료 체재에 내재한 불평등과 부조리함 속에서 자유할 수 없음에 분노합니다.
치료받을 권리
나는 응급실에 있을 때 아내와 내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에 동료들이 굉장히 놀랐다는 말을 들었다. 우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 시스템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그렇게 작동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재력과 연줄로 의료보장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우쭐할 것이다. 자신들은 누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건강에 대한 우리 인간의 관심을, 민주주의를 좀먹는 암묵적이지만 심각한 불평등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해시태그를 보는 『치료받을 권리』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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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받을 권리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알약이 덜 필요하다
스나이더 교수는 2000년대와 2010년대 유럽에서 일할 때 극심한 편두통으로 현지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일이 잦았습니다. 미국에서 많은 의사는 약 복용을 권했으나 유럽의 의사는 약 대신 환자와 대화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들은 스나이더의 편두통을 개선하려면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라고 권했다는 거예요. 이 얼마나 비과학적으로 들렸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진심이었고, 편두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스나이더의 고민을 들어주고 같이 고통을 분담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미국에서는 결코 상상도 못했던 여유 있는 유럽 의료진의 보살핌 덕분에 알약과 고통을 뛰어넘는 대안이 존재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환자를 보지 않고 화면만 바라보던 의사들이 떠오르다
이 대목에서 내가 병원을 찾을 때마다 드는 불쾌감에 대해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병실에 들어설 때 여러분은 의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으세요? 저는 거의 없어요. 안녕하세요 인사와 함께 들어서면, 그 의사의 눈은 99.99% 화면을 보고 있습니다. 간단한 질문 몇 개에 대한 답을 적고, 조금 얼버무리면, 바로 다음 질문으로 훅 쳐들어옵니다. 의사 마음대로 진찰일지 프로그램에 디폴트 값을 무작정 입력한다는 착각도 하게 됩니다. 이즈음 되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마치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처방전이나 받아서 나가세요라고 말하는 거 같거든요. 의료 행위는 눈으로 해주십시오. 비겁하게 화면 보지 마시고. 저는 의학은 모르지만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The Truth will Set Us Free
전리가 널 자유롭게 하리니... 코로나 팬데믹으로 무수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못 사는 후진국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뉴스에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미국이 참상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게 정말 사실인지 제가 읽고 있는 내용을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폭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교란시켰고 많은 사람이 삽시간에 죽은 이유는 검사 자체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2020년 3월 초 한국에서 7만 5천 명이 코로나 검사를 받았을 때, 미국에서는 단지 352명만 코로나 검사를 받았습니다. 트럼프 정권이 미국 국민의 눈을 흐리게 할 수 있던 데는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했던 지역 기자가 씨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스나이더 교수는 오로지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트럼프는 진실을 틀어막는 수훈자이었으며 그 대가는 무고한 시민의 코로나 감염과 죽음이었다는 겁니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고귀한 마법사 간달프는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가진 힘만으로는 이 세상을 구할 수 없기에 그들에게 닥친 위협을 다른 이와 나누고 연합하려 합니다. 연대만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반지의 제왕』속 간달프의 용기가 많은 사람에게 조롱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많은 이가 그걸 알았어도 뭘 어찌했겠는가와 같은 자조 섞인 자리 합리화 속으로 자멸하는 건 아닐까요? 간달프는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앎의 부재는 자유는 있을 수 없노라고.
In the story, as in life, people chooses ignorance to supply themselves with an excuse for submission: how could we have known, what could lwe have don? This is one way to be human, but it is no way to be free. Gandalf finally retorts that without knowledge freedom has no chance.
『치료받을 권리』의 영어 원작: Our Malady 중에서
Solitude and Solidarity 고독과 연대
분명 나는 이 책을 3시간에 걸쳐 영한 번역본으로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스스로 이해가 안 가고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몇 가지 번역체가 내 몸에 맞지 않는 옷 마냥 겉도는 느낌이 들었어요. 가장 큰 불편함은 핵심어에 해당하는 Solitude라는 영어 단어를 고독으로 계속 읽으면서 불거진 문제였습니다. 분명 Solitude는 영한사전에 고독이라고 정의합니다. 나는 Solitude를 명상에 가까운 홀로 있음으로 늘 알았으므로 고독과 Solitude를 일체화 시킨 적이 없습니다. 아마 내가 게으른 학생으로서 낱말을 익힐 때 영한사전을 즐겨 찾지 않고,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 반복되는 낱말이 나오면 정황으로 이해하면서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늘 Solitude는 기꺼이 맞이하는 홀로 있음을 상기했던 것입니다. 번역된 책에는 책 서문에서부터 고독과 연대라는 표제어로 책을 시작하는데요. 영어 원서 Our Malady로 일부 교차하며 읽어보니 고독이 Solitude로 나와있습니다. 나는 고독이라는 낱말을 들으면 외로움, 쓸쓸함, 우울함과 함께 연상됩니다. 그러나 Solitude는 결코 그런 느낌이 아니거든요. 고립됨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여 머리를 맑게 하는 잔잔하고 평정한 상태의 홀로 있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훌륭하신 번역가님이 해석했지만 이런 번역은 내가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Solitude 하니, 아래의 명화가 떠올랐어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 Caspar David Friedrich -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 1818
산 위에 홀로 서있는 신사의 머리칼이 바람에 살짝 흩날립니다. 그의 시선은 끝없이 펼쳐진 안개바다 속 세상을 고즈넉이 바라보네요. 새벽인 듯 안개에 휩싸인 세상은 더없이 고요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신사의 마음속은 곧 이어질 세상과의 조우에 심장만은 새벽의 고요를 무너뜨립니다. 그는 캔버스의 정 중앙에 서있습니다. 역동적인 붓의 질감이 흑과 백의 명료한 대비로 더없이 힘찬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는 산의 정상에서 홀로 있음(Solitude)을 기꺼이 즐기며, 세상과 연대(Solidarity)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문학자가 쓰는 일기는 다르구나
아파 죽겠다 생각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병상에서 그는 하루하루를 기억했고 때로는 기록했다. 병상에 누워 관찰한 의료 현장의 벌어지는 여러 종류의 불평등을 목격하고 분노한다. 그는 그가 품은 분노를 선으로 이끌기를 원했고 미국이라는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외친다. 병상에서 홀로 있으면서 혼자일 수 없음을 인지한다. 그는 다른 사람과 공감하기를 원했다. 사람은 결코 혼자일 수 없으며 서로 연대할 때만이 가치 있다고 말한다. 건강을 잃고 무자비한 미국의 의료보장을 돌이켜보며 가난하건 부자이건 평등하게 의료 복지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내재한 우리의 질병 Our Malady인 관료주의, 중우정치, 자본주의의 패해를 신랄하게 꼬집는 수작이다.
촌철살인 표현이 많습니다
매끄럽지 않은 번역체-아쉬움
늘 번역본을 읽다 보면 원본 뒤에 감춰진 민낯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100%라고 생각해요. 번역은 또 다른 창작 작업이라고 믿으므로 원서로 읽을 수 있는 독자라면 굳이 우리말 번역으로 읽을 필요가 없지요. 영어로 출판된 책은 가능하면 우리말 번역 책(저는 주로 서평 당첨해서 읽어요)과 원서를 비교 대조하며 읽은 편입니다. 1 대 1 교차 번역은 안 합니다. 제가 뭐 연구원도 아니고. 가끔 우리말 번역이 가슴에 와닿지 않을 때는 시간이 걸려도 원본을 살펴봅니다. 번역가 선생님은 서울대 영문과와 대학원을 거쳐, 도미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신데요. 제가 뭐 태클 걸 위치가 아닙니다. 다만, 저의 우리말 실력이 안 좋은지 몇 부분은 원서를 곱씹어 보니 이해가 되는 대목이 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