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도망가거나 신분을 바꾸거나 머나먼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살을 생각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록 리노 같은 아들이 자신의 몸에서태어났고 그를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릴라가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 P17

릴리는 말 그대로 증발하기를 원했다. 그녀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뿔뿔이 흩어져서 그녀에 대한 그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릴라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잘 알고 있다고믿기 때문에, 그녀가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사라지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P18

나는 릴라가 나폴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도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이 모든 이치를 다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릴라에게 인정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부끄럽게느껴졌다. 내 말에서 노인네 특유의 고약한 염세주의가 느껴졌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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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삶이란 생활이란 이런 것이다.
이 소설은 집중해서 읽기 힘들고, 중간에 때려쳐도 상관없다. 그러나 계속 읽게 되는 것. 미미한 희망을 안고 계속 읽어나가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그것과 같다.매우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내 최고 소설 중 하나이다.
누구애게 권하긴 매우 힘들지만 읽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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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는 자홍색, 에메랄드색, 주홍색, 색색가지 액체가 채워진병들이 아래쪽 조명으로 환하게 빛나며 놓여 있었다. 그 병들이 온방을 밝혀주는 듯이 보였다. 담배 연기에 눈이 따가워서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음악은 잦아들었다가 다시 무시무시하게 커지곤했다. 나는 내 의자 뒤의 벽감에 쳐놓은, 기름 먹인 반들거리는 천으로 만든 검은 커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기이하게도 커튼은 아주 차가웠다. 등불은 알프스의 소 방울 모양이었다. 바 위쪽으로는복슬복슬한 흰 원숭이 한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다음 순간, 정확하게 샴페인을 마신 만큼 취했을 때, 뭔가 환상을 본 것 같았다. 나는한모금 마셨다. 그리고 이제 아주 선명하게, 어떤 열정이나 악의도없이, 나는 삶이 진짜로 무엇인지 보았다. 그건, 내 기억으로는, 빙빙 돌아가는 햇빛 가리개와 관련이 있었다. 그래, 춤추게 내버려둬.
나는 중얼거렸다. 그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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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가올 용기를 내려고 애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샬럿이 혹시 엉뚱한 해석을 하지 않게 하려고 나는 가방에서 『전망 좋은 방』을 꺼내 6장을 펼쳤다. 대화 중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일보다 책을 읽는 한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더 꺼리는 것은 인간의본성 중에서 기묘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부분이다. 설사 그 사람이읽고 있는 책이 멍청한 로맨스소설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 P133

"뉴욕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문제가 바로 저거야. 남들처럼 뉴욕으로 도망칠 수가 없잖아."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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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사진을 둘러보고 있는젊은 변호사와 신참 은행원과 활기찬 사교계 아가씨 들은 틀림없이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정말 절묘한 사진들이야. 이 얼마나 예술적인지.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의 얼굴이야!‘
하지만 사진이 찍히던 당시에 젊은이였던 우리에게는 사진 속 사람들이 유령처럼 보였다.

1930년대….
그 얼마나 힘든 시절이었는지..
대공황이 시작됐을 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1920년대의 태평하고 매력적인 분위기에 속아 넘어가 꿈과 기대를 품기에 딱 적당한 나이. 마치 미국이 맨해튼에게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해 대공황을 발진시킨 것 같았다. - P14

"바로 그 말이에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신도들이 점점 떨어져 나갔어요. 새로운 신자들은 자기들만의 교회를 지었고, 크고 오래된 교회들은 그냥 홀로 남겨졌죠. 노인들처럼, 전성기 시절의 기억만 간직한 채로, 그런 분위기가 나한테는 아주 평화롭게 느껴져요."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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