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을 자학으로, 울분을 망상으로 바꿔치기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는것이 이 남자가 세상을 사는 방식인 것이다. 모노이는 그렇게 생각해보았다. 사회와 조직과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이 곧 등을 떠미는 힘이 되고, 자학과 망상의 쾌감이 곧 일용한 양식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충분히 뒤틀려 있다. 요컨대 이 남자의 악귀는 그런 식으로 드러나고있는 것이다. 자신의 격정적인 악귀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한다에게도분명 악귀가 있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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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노라는 사람에 대한 한다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표본상자 속 나비였다. 겉모습은 완벽하지만 그저 정물일 뿐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져버리는. 실제로도 곱게 자란 양갓집 도련님이 그대로 중년이 된 것같은 무심함, 지능지수만으로 이뤄진 듯한 무기질적 분위기, 상당히잡한 사고회로를 짐작게 하는 우울 등이 뒤섞인 외모는 다분히 차가워보였고, 묘하게 풍기는 공허함도 아들을 잃은 탓만은 아닌 듯했다. 눈동자의 움직임에서 심상치 않은 불안감도 조금 엿보였다. - P125

내일부터 계속 이런 식이려나.
주택가의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오랜 습관처럼 또 한 자락의 새로운 몽상이 한다의 가슴으로 미끄러져들어왔다. 어느 날 사직서라고 쓴 봉투를 상사의 책상에 내던진다는 유치한 몽상은 대단한 쾌감도 주지 못하고 금세 맥없이 사그라졌다. 지금의 한다는 사직서가 일대사건이 될 만한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사직서를 집어든 상사가깜짝 놀라고, 온 서내가 들썩거리고, 본청이 경악해서 어떻게든 철회시키라며 낯이 새파래질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이 몸의 퇴직을 두려워하는 자, 아쉬워하는 자가 어디 있으랴.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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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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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지는 않고, 관심을 안 가지려고 할 뿐이야. 병석씨도 나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좋겠고. 아니, 병석씨만이 아니라 아무도나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좋겠어. 난 세상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않아. 눈에 안 띄고 싶어.
나도? 채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반희가 말했다. 채운씨만 빼고. 그러니까 내가 채운씨는만나잖아.
그래서 외갓집에도 안 가는 거야?
외가가 아니라 내 본가.
알았어. 엄마 본가.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 P75

엄마, 나 사랑하지?
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아. 엄마 보면 날 사랑하는 거 맞아. 날 사랑해서 힘든 게 보여. 나도 엄마 사랑해. 그래서 힘들어. 근데 엄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는 거야?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왜 이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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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란 비와 같아서,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도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내린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때로는 소위 운명이라는 것을형성하기도 했다. 우연이란 난데없이 등장했다. 예상치 못하게, 기이하게 설명할 수 없게.
에를렌뒤르는 우연의 일치를 다른 것과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경험상 그는 우연의 일치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알았다. 우연은 의심 없는 개개인의 삶 속에 교묘하게 심길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더이상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명칭이야 여러가지 붙을 수 있겠지만, 에렌뒤르가 몸담은 곳에서 그런 우연을칭하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범죄.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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