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영이 그렇게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불안, 초조함, 두려움까지, 비록 부정적이기는 했어도 다양한 감정이 풍성하게 담긴, 통제되지 않는 목소리였다. 인공적이지 않았다. - P189

로봇이라기에는 얼굴 근육이나 몸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표정에 통제되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반가움과 기쁨이 가득했다. 사람이라기에는… 사람이 저런 일을 저렇게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람은 비싸다. 불투명한홀로그램보다 훨씬 더. 아무래도 ‘인공적‘이라는 단어를 없애든지, 뜻을 다시 규정해야 할 것 같았다. - P190

다정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리는 바람에 연지혜는 화들짝 놀랐다. 이번에는 어지럼증을 염려하지는 않았고 그저 화가 치밀었다. SUV의 운영체제가 연지혜의 시선을 살피고있다가 궁금해한다 싶은 기색이 된 걸 알아차리고 끼어든 모양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기능을 켜놓는 사람이 다 있네. 연지혜는 그녀에 앞서 차량을 이용한 승객을 속으로 욕했지만 겉으로는 "아이고" 하고 중얼거리기만 했다.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길지 않게. 먼저 말을 꺼내진 말고."
연지혜가 지시했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사무적인 여자 목소리로 바꿔줘."
[네, 알겠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그래."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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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만큼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것은 없을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풀베개』(1906년)에 적어 넣은 문장이다.
이후 "은하수 왼쪽 기슭을 따라 펼쳐진 철로위를 달리는 영원의 기차를 묘사한 미야자와겐지(「은하철도의 밤」), "국경의 긴 터널을지나자" 나타나는 비현실의 세계를 그린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철도 시간표를이용한 트릭을 적극적으로 내세워 ‘트래블미스터리‘를 개척한 마쓰모토 세이초 등 많은작가들이 ‘이동하는 자아‘의 여수(旅愁) 안팎을담아냈다. - P21

아메리칸 고딕은 호러라는 장르와교집합을 이루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차라리 하나의 무의식적 풍경이자 정서다. 예를 들어 중서부 어딘가의 누런 초원에버려진 낡은 집과 윙윙대는 바람 소리,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바람개비 같은 것. 그안에 누가/무엇이 있는지, 혹은 있었는지우리는 왠지 알 것만 같다. 그 사연에 숨은폭력과 공포와 회한과 슬픔 역시도. - P111

서던 고딕 소설의 특징은 정신적으로불안하거나 고집스럽고 괴이한 편벽을지닌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감추고있는 가문이나 개인, 공동체의 오래된비밀과 공포, 버림받고 잊힌 사람들의비애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알코올의존자이거나, 폭력적인 가장을 둔 빈곤한가족이거나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질병을 앓고 있거나 간혹 후두(hoodoo)즉 카리브해 출신 흑인 노예들이 가져온유산이자 강력한 마법에 의존하여공포스러운 행각을 벌인다.
조이스 캐럴 오츠가 좀비(공경희옮김, 포레 펴냄), 「흉가』(김지현 옮김, 민음사 펴냄), 악몽』(박현주 옮김, 포레펴냄) 등 공포나 초자연을 직접적으로다뤘던 뚜렷한 서던 고딕 계열의 작품들에비해『블론드』는 비교적 무난한 작품으로보일 수 있으나, 실상 그렇지 않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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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우리 모두미스터리를좋아하기시작한 최초의기억들을더듬어본다면 그 입문에는언제나 밀실이 존재하고 있을것이다. 우리는 그 밖으로도망치든, 그 안으로 뚫고들어가든, 밀실을 굳게 가리고있는 벽과 문을 부숴버리는순간의 카타르시스를사랑했다. - P17

우리의동시대에서밀실의 의미는어디서 찾을 수있을까. 직접몸을 누이는 ‘내방‘에서 세계와나의 거리를가늠할 때, 매일 접하는 온라인에서떠돌아다니는 꽉 짜인 사각형18프레임의 밈(Meme) 속에서 불현듯낯설고 서늘한 감각을 감지할 때에대해서 얘기해본다면 어떨까. - P18

범죄자도 피해자도육체를 가진 사람이다. 벽을 스르르 통과하거나 순간 이동을 할 수는 없다. 밀실트릭을 창조하는 작가는 시시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진상을 현란한 눈속임으로 가려야한다. 눈속임과 진상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눈속임에 현혹되었던 독자의 카타르시스는더욱 강렬해진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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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봄씨가 했던 말들은 차갑거나 못됐거나 그런 말이아니야, 그냥, 뭐랄까, 그냥,"
(중략)
"그건 그냥 너어무 두려워서 움츠러든 사람이 하는 아주 작은 말일 뿐이었을 거야" - P183

. 그중 기억에 남는 말은 "너무 상한사람곁에는 있지 말라"는 것이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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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나가는 마음을 멈추지 못하는 스물네살의 야콥과 그 다가섬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스물셋의 예후이, 비슷한 이유로 포기라는 걸 고려하지 않는 동갑의윤슬까지. 그 모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샹강의 수천그루 귤나무가 해를 거듭해 자라고 노을이 강물을 물들이며 바람이 새들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것처럼. - P131

건초 더미처럼 수북한 자기 불행과 부채를 근심하는라 집안을 살필 여유가 거의 없었으니까. 하루하루 어떻게든 버티다가 이따금 휘몰아치듯 집을 치우며 내 생활습관을 타박하고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아빠가 겨우유지할 수 있는 돌봄의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고아원에는 안 보낸다" 따위의 말을 하면서. 그 말은 처음에는 막연한 공포였다가 나중에는 반감이 들게 했고 이내*오기를 불러일으켰다. 버림받느니 먼저 떠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 같은 것.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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