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휘젓는다기보다 상대방의 생각이 마구 뒤섞일 수 있는 그릇 역할을 해드릴 뿐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럴 수 있는 여력이 없거나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겁을 내거든요. 뒤섞인다음에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 P161

강치우라는 작자, 글은 거의 안 쓰는 것 같아요. 피시방에서 보이는창문이 강치우의 삼층 작업실인데요, 책상이 정확하게 보이거든요그런데 일주일 동안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소설가라는 이름만 달아놓고 뭔가 뒷일을 하고 있지 않나, 그런 추측을 또 한번 제가 해봅니다. - P104

"소설가는 관찰하는 사람이에요. 관찰의 핵심이 뭔지 알아요?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내가 드러나면 관찰이 제대로 이뤄질 수없어요. 나를 버리고 상대를 온전히 지켜볼 수 있을 때 관찰이 완성되거든요. 그래서 소설가는 경력이 거듭될수록 눈에 잘 띄지 않는사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겁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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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소설은 앤 래드클리프 등 여성 작가가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쓴 여성적인장르다. 고딕소설은 비밀을 감춘 오래되고음침한 건물, 음울한 악한, 고통받는여인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장르의관습으로 삼는다. 이런 설정 자체가 가정영역에 갇혀 가부장적 통제에 구속당하는여성의 공포를 반영하고 있다. 그렇지만고딕 소설은 비현실성, 감정 과잉, 격정, 어리석음, 히스테리, 과대망상 등 여성의특질로 생각되던 요소들로 이루어졌다는이유로 남성들에게 수준 낮은 읽을거리로취급받아왔다. - P65

[미저리』에서는 남성적 장르와 여성적장르를 이분법적으로 그리고 위계적으로나누고 책을 (잘못) 읽는 여자를 위대한문학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며 작가의실존마저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악으로지목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에게영향을 미쳐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게구속한다고 믿는 과대망상에 시달리는사람은 고딕소설 속의 여주인공이 아니라자의식이 과도한 남성 작가인 것 같지만말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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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한 책 더미에서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으로 풀풀 날리는 먼지때문에 손가락이 더러워지는 걸 감수하며새로운 세계로 덤벼들던 순간을 기억하는, 그리고 지금도 그걸 계속하고 있는 책벌레들이주인공입니다. 독자와 사서와 연구자와 서점직원(과 도둑)까지, 책이 구성하는 세계에서작가만큼이나 중요한 축들이 집중 조명됩니다. 결과적으로 책에 대한 책, 독서 행위와 독자에대한 책, 책을 둘러싼 욕망과 범죄와 파멸이뒤엉키는 책들을 한곳에 모았습니다. - P2

설령 작가들이 모종의 이유 때문에절망하고 좌절하고 숨어버리더라도, 이책벌레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발굴하는수호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아래 인용한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처럼,
원고는 결코 불타지 않습니다. 책은, 이야기는사라지지 않습니다. 파괴의 운명에서 책들을건져 올리고 안전하게 숨기고 수십 번 수백번이라도 열성적으로 읽으며 행간에 숨겨진의미를 찾아내고 작가가 아예 생각도 못한관계성을 끄집어내 재해석하고, 작품이 씌었던과거와 작품을 읽는 현재 사이의 간극에서새로운 컨텍스트를 발견하는 이들이 존재하는한, 원고는 거듭 돌아올 겁니다. - P2

‘도서관 수호자‘라 불리는 최초의특별 조사관 에드윈 화이트 길야드는 뉴욕공공도서관에서 사라진 책을 되찾는 일을전담하는 인력이었다. 하지만 포의 시집과관련한 수사를 하게 된 사람은 후임자인G. 윌리엄 버그퀴스트였다. 그리고북로우의 도둑들도 세대교체가 된다.
이상한 얘기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면책의 전성기란 이미 한 세기도 더 전에지났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더 많은 책이출간되고 더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지만. 그런데 이렇게 말하니 도둑을 옹호하는 것같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며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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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영이 그렇게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불안, 초조함, 두려움까지, 비록 부정적이기는 했어도 다양한 감정이 풍성하게 담긴, 통제되지 않는 목소리였다. 인공적이지 않았다. - P189

로봇이라기에는 얼굴 근육이나 몸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표정에 통제되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반가움과 기쁨이 가득했다. 사람이라기에는… 사람이 저런 일을 저렇게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람은 비싸다. 불투명한홀로그램보다 훨씬 더. 아무래도 ‘인공적‘이라는 단어를 없애든지, 뜻을 다시 규정해야 할 것 같았다. - P190

다정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리는 바람에 연지혜는 화들짝 놀랐다. 이번에는 어지럼증을 염려하지는 않았고 그저 화가 치밀었다. SUV의 운영체제가 연지혜의 시선을 살피고있다가 궁금해한다 싶은 기색이 된 걸 알아차리고 끼어든 모양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기능을 켜놓는 사람이 다 있네. 연지혜는 그녀에 앞서 차량을 이용한 승객을 속으로 욕했지만 겉으로는 "아이고" 하고 중얼거리기만 했다.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길지 않게. 먼저 말을 꺼내진 말고."
연지혜가 지시했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사무적인 여자 목소리로 바꿔줘."
[네, 알겠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그래."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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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만큼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것은 없을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풀베개』(1906년)에 적어 넣은 문장이다.
이후 "은하수 왼쪽 기슭을 따라 펼쳐진 철로위를 달리는 영원의 기차를 묘사한 미야자와겐지(「은하철도의 밤」), "국경의 긴 터널을지나자" 나타나는 비현실의 세계를 그린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철도 시간표를이용한 트릭을 적극적으로 내세워 ‘트래블미스터리‘를 개척한 마쓰모토 세이초 등 많은작가들이 ‘이동하는 자아‘의 여수(旅愁) 안팎을담아냈다. - P21

아메리칸 고딕은 호러라는 장르와교집합을 이루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차라리 하나의 무의식적 풍경이자 정서다. 예를 들어 중서부 어딘가의 누런 초원에버려진 낡은 집과 윙윙대는 바람 소리,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바람개비 같은 것. 그안에 누가/무엇이 있는지, 혹은 있었는지우리는 왠지 알 것만 같다. 그 사연에 숨은폭력과 공포와 회한과 슬픔 역시도. - P111

서던 고딕 소설의 특징은 정신적으로불안하거나 고집스럽고 괴이한 편벽을지닌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감추고있는 가문이나 개인, 공동체의 오래된비밀과 공포, 버림받고 잊힌 사람들의비애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알코올의존자이거나, 폭력적인 가장을 둔 빈곤한가족이거나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질병을 앓고 있거나 간혹 후두(hoodoo)즉 카리브해 출신 흑인 노예들이 가져온유산이자 강력한 마법에 의존하여공포스러운 행각을 벌인다.
조이스 캐럴 오츠가 좀비(공경희옮김, 포레 펴냄), 「흉가』(김지현 옮김, 민음사 펴냄), 악몽』(박현주 옮김, 포레펴냄) 등 공포나 초자연을 직접적으로다뤘던 뚜렷한 서던 고딕 계열의 작품들에비해『블론드』는 비교적 무난한 작품으로보일 수 있으나, 실상 그렇지 않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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