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 발생한 건 내가 아니라 이 세계다.
그래, 맞아.
어딘가의 시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소멸하고, 혹은 퇴장하고, 다른 세계가 거기에 자리바꿈을 한 것이다. 레일 포인트가 전환되는 것처럼. 즉, 지금 이곳에 있는 내 의식은 원래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세계 그 자체는 이미 다른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곳에서 이루어진 사실의 변경은 지금으로서는 아직 한정된 몇가지뿐이다. 새로운 세계의 대부분은 내가 알고 있는 원래 세계로부터 그대로 흘러들어와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생활을 해나가는 데 특별히 현실적인 지장은 현재로서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러한 ‘변경된 부분‘은 아마 앞으로 갈수록 더욱더 큰 차이를 내 주위에 만들어갈 것이다. 오차는 조금씩 불어난다. 그리고경우에 따라 그러한 오차는 내가 취하는 행동의 논리성을 손상시켜 자칫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할지도 모른다. 일이 그렇게된다면, 그건 말 그대로 치명적이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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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프로세서 화면으로 보는 것과 용지에 프린트한 것을 보는 것은, 완전히 똑같은 문장이라도 눈에 들어오는 인상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연필로 종이에 쓰는 경우와 워드프로세서의 키보드로 치는 경우는 채택하는 언어의 감촉이 다르다. 양쪽의 각도에서 점검해보는 게 필요하다. 프린트 종이에 연필로 수정한부분을 기기의 전원을 켜고 하나하나 화면에 반영한다. 그리고새로워진 원고를 이번에는 화면으로 다시 읽어본다. 나쁘지 않아, 라고 덴고는 생각했다. 각각의 문장이 합당한 무게를 지녔고거기서 자연스러운 리듬이 생겨났다. - P153

"나 혼자라서 별거 없어. 말린 꼬치고기 좀 굽고, 무는 강판에갈고. 파 넣은 조개 된장국 끓여서 두부하고 함께 먹을 거야. 오이하고 미역 초무침도 하지. 그다음은 밥하고 배추절임. 그거뿐이야."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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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고는 말했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언어를 사용하여 내 주위의 풍경을 내게 보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치환해나가. 즉 재구성을 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나라는 인간이 이 세계에 틀림없이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그건 수학의 세계에 있을 때와는상당히 다른 작업이야."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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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자신이 늙었다고 느꼈다. 노인이 그렇게 느끼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그는 마치 너무 늙어 더 이상 아무 일도겪지 않을 사람처럼, 어떤 새로운 일도, 어떤 좋은 일이나 나쁜 일도 겪지 않을 사람처럼 느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날 일은 모두 일어났다고 느꼈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거나, 일어났어야 하는 일까지도. 마치 일시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사람처럼, 결정적으로 인생을 끝까지 산 사람처럼,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소박한 상을 받고, 자신이 베푼 덕행의 대가로는 오히려 심한 벌을 받았다고 느꼈다. 또한 오래전부터 계속해서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등장인물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런 무미건조함은(누가 어디에서 또한 어떤 암시에 따라서이 무미건조함을 예상할 수 있겠는가.) 불필요한 등장인물에게서 나온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날이 감에 따라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했다.(그리고 그것을 그리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다.) (마치 그러한 것을 느껴야만 하는 사람처럼.)(항상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그러나 그는 전혀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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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지루함과 이상한 기다림, 나는 이 인상이 아우슈비츠의 진정한실체를 대략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내 관점에서 말이다. - P131

어떤 관점에서는 내가그것을 정당하게 인정해야 했다. 실제로 나는 비틀거렸고 허리가 구부정하고 눈이 깜깜했지만 그것을 견뎌 냈다. 나는 포대를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고 오가며 짐을 날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결국 그가 옳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그날이 끝나갈 무렵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치료가 불가능할정도로 크게 손상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부터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날이 마지막 아침일 거라고 생각했고걸을 때마다 더 이상 걷지 못할 거라고, 움직일 때마다 더는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여전히걷고 움직이고 있었다. - P185

서 얘기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유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 아직까지 나오지 않는 수프에 대해서는 어떤 암시나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자유의 몸이 된 것이 무척 기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어제 일어날 수는 없었던 것일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밖을 보니 4월의 밤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피에트하가 흥분으로 빨개진 얼굴로 다시 돌아와서는 알아들을 수도없는 말을 계속 쏟아 냈다. 그와 동시에 스피커에서 다시 총반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감자 껍질을 벗기는 사람들에게 부엌으로 좀 와 달라고 부탁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매운 구야시 수프11)를 끓일 예정이니 밤이 늦더라도 자지 말고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마음이 놓여 베개에 기댔다. 내 속에서 뭔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자유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 P253

그는 12 곱하기 365일을, 다시말해 12 곱하기 365 곱하기 24시간을, 또다시 말해 12 곱하기365 곱하기 24 곱하기 등등의 이 모든 기간을 초 단위로, 분단위로, 시간 단위로, 날짜 단위로 보내야 했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들에게도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이 모든 12 곱하기 365 곱하기 24 곱하기 60 곱하기 60의 시간이 그들 앞에 일시적으로동시에 들이닥쳤다면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 P270

나 역시 주어진 하나의 운명을 버텨 냈다. 그것은나의 운명이 아니었지만 나는 끝까지 살아 냈다. 그들이 왜 내가 지금 그것을 품고 출발해 어딘가로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착오이고 우연이고 일종의 탈선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 P281

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나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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