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아이들 -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조선족 아이들 이야기 문학동네 청소년 8
박영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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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아주마이들 없으면 한국 요식업계는 폭삭 망해버릴 거야.”

(중략)

“요즘 우리나라 젊은 애들이 그런 일을 해야 말이지. 개뿔도 없는 것들이 폼나는 직업들만 찾으니까 별수 있어. 중국제라도 수입해와야지.

- 정이현 장편소설 <너는 모른다> (P. 284)

 

  4센티미터쯤이다. 서울에서 조선족 자치구로 알려진 길림성이나 그 주변까지의 거리는. 무심코 바라본 세계지도는 기어이 눈금자를 들게 했다. 자국이 세계 중심에 위치하도록 제작한다는 세계지도. 길림성이나 대한민국에서 완성된 세계지도의 중심은 별반 차이가 없겠다. 고작 4센티미터 떨어져 있잖은가.

 

  그러나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던 시간은 물리적 간극을 무시하고 40센티미터쯤으로 만들었다. 중국 황무지를 개척한 억척스러운 동포로 기억되던 조선족이 한중수교 이후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어도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같은 생활공간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치는 그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물질만능 사고에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우리가 존중과 배려를 던져버리고 맹목적인 측은함 내지는 업신여김으로 그들을 대했기 때문일까. 조선족을 배제한 ‘우리’라는 말에 마음의 거리는 400센티미터쯤으로 걷잡을 수 없이 멀어졌다.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내며 한국에서의 돈벌이를 고집하는 조선족이 늘어날수록 야기되는 문제가 있다. 가정의 경제적 안정을 찾고 자녀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 취업 비자를 신청하게 되지만 바람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다. 부모와 오래 떨어져 지낸 만큼 흔들리는 아이들은 가정파탄이란 태풍으로 뿌리째 뽑힐 위기에 놓인 어린 묘목이 되기 일쑤다. 현재 조선족 아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현장을 취재한 박영희의 <만주의 아이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출간된 르포다.

 

  1920년대 생활고를 해결하거나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만주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조선족 사회는 일본에 의한 조선인 개척단 강제 이주로 인구가 증가했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는 놀라운 개척 정신과 근면함으로 한족에게까지 인정받던 조선족이 광복을 맞이하자 귀향 이동으로, 6․25전쟁이 휴전되고 전쟁의 위험이 한결 가라앉자 당시 경제 수준이 높았던 북한 이동으로 감소했다. 이후 조선족 사회는 나름 안정을 찾으며 100여 년 역사를 이어왔으나 한국 바람은 짐작보다 매서웠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떠나는 사람들을 막을 순 없었다. 자식도 붙잡을 수 없는데 과연 누가 막겠는가. 40만, 수치상으로는 1/5이 떠난 셈이지만 경제활동인구를 감안하면 사회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사회의 근간인 가정이 붕괴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족이 윤택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만 한국에서 체류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자기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음을 자인해야 하는 순간이 현재로 닥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물론 더러는 악착같이 돈 벌고 귀향하여 아파트도 사고 가게도 열지만 태반은 당장의 물질에 집착하게 되고 소비에 익숙해진다. 새로운 의식과 가치에 노출되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면 새 사람이 보이고, 새 사람과 새 출발하도록 자신을 부채질하게 된다. 2년짜리 한국방문취업제가 5년으로 연장되면서, 게다가 재신청이 가능해지면서 부모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만주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과 재혼을, 부록처럼 따라붙은 무관심까지 떠안아야 한다.

 

어느 사회나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이혼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네. 다만 염려가 되는 건 만주에 남은 아이들의 미래가 썩 밝지 못할 거라는 점이네. (P. 270)

 

  만주 아이들은 기숙사를 막장으로 여긴다. 조부모에 의탁하거나 친척집을 전전하던 아이들을 각각의 사정과 여러 상황이 내모는 곳은 바로 기숙사다. 부모의 손길이 가장 필요할 시기를 혼자서 허우적거려야 한다. 어리광부릴 상대가 없으므로 서둘러 어른 티를 낸다. 온기를 받으며 조숙한 게 아니므로 자주 삐걱거린다. 이는 청소년 비행 문제로 연결된다. 자식이 중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갈 처지에 놓였어도 달려오는 부모는 소수다. 더 좋은 옷을 해 입히고 더 좋은 학교에 보내, 더 나은 인생을 살도록 이끌어주려고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서 매달 송금하는 액수로 자녀에 대한 애정의 척도를 가늠하곤 하다가 이마저도 중단되었다면 자식과 본인 중에 하나를 선택한 셈이다. 이쯤 되면 문제아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터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하나같이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의 이혼이라는 통계를 본 적 있다. 엄청난 천재지변도 부모의 이혼보다는 두렵지 않다.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불안에 시달리는데 불안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국의 대중문화에 열광하면서 동시에 몹쓸 땅으로 여기는 아이들은 한국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아빠를 사진 속의 얼굴로 떠올리게 했고, 아빠 품에 안긴 기억을 없애버렸다. 운 좋게 한국 땅에 밟았으나 뭇 아저씨로만 보이는 아빠에게 다가갈 수 없어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다시 취업 비자를 받아야 할 때야 비로소 낯설어진 부모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했다. 한국으로 떠난 엄마가 시집간다며, 이제는 돌아가지 못한다며 보내온 딸라(달러)로 종이배를 만들어 강에 띄우며 “딸라배야 딸라배야, 나는 네가 싫고 엄마가 좋다야.”라고 외치는 소녀의 간절함이 배어나는 동화 <딸라배>가 탄생되게 했다. 영영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만든 것뿐만 아니라 시시때때로 술 취한 아빠로부터 폭력에 시달리게 만들게도 했다. 조선족 부모의 이혼율이 무섭게 늘어나도록 했다. 한국은.

 

아내도 갔다 남편도 갔다 삼촌도 갔다 모두 다 갔다

한국에 갔다 일본에 갔다 미국에 갔다 러시아로 갔다

잘살아 보겠다고 모두 다 갔다 눈물로 헤어져서 모두 다 갔다

산다는 게 뭐이기에 산산이 부서져

그리움에 지쳐 가며 살아야 하나

오붓하게 살아갈 날 언제나 올까 손꼽아 기다린다네 (P. 130)

 

  요즘 조선족들이 곧잘 부른다는 노래 ‘모두 다 갔다’의 선율을 들은 바 없지만 가사만으로도 곰삭은 생채기가 느껴진다. 효범이나 정우가 이 노래를 부른다면 이내 두 개의 물줄기가 볼을 타고 내려갈 것 같다. 효범은 남들처럼 잘살아보겠다고 빚내서 한국으로 떠나더니 소식을 끊은 올케와 빚 다 갚자 아내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으로 훌쩍 떠난 동생을 대신해 허 씨가 키우는 조카다.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아 숙사로 보내고 싶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유독 체구가 작은 정우는 일종의 하숙인 합숙소에서 생활하는 아이다. 장애인 엄마를 시설에 보내고 아들을 합숙소에 보내고 가족의 미래를 위해 아빠는 한국에 갔다. 정우가 바라는 것은 돈일까, 아니면 예전처럼 세 식구가 함께하는 삶일까.

 

  이미 이러한 굴곡을 충분히 겪은 청소년보다 효범, 정우 같은 열 살 전후 아이의 고통이 가슴에 와 닿는다. 특히 영군의 안타까운 사연은 숨을 멎게 한다. 한국으로 가려다 북한으로 추방당한 엄마를 영군은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탈북자는 정착금이 지원되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행을 고집했으나 민경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허나 설사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더라도 만날 수 없는 확률은 매우 높다. 다른 탈북 여성들처럼 조선족 남성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한국으로 가기 위한 길목으로 판단했을지도 모르므로.

 

  조선족 3,4대는 한국을 조국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기회의 땅일 뿐이다. 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그렇다보니 조선족 학교도, 한국어 배우려는 아이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를 잇는 소중한 도구인 언어가 소통되지 않을 먼 훗날, 한민족 정체성 문제로 제기될 심각성은 차치하더라도 아이들 개개인의 바람직한 성장에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하는 부모의 부재는 간과할 수 없다.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세계가 부모다. 아이에게 있어 엄마, 아빠의 언행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의 지혜가 된다. 모델이 되어주며 한결같은 지지를 아끼지 않으면 아이들은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고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확고한 내면세계를 구축하고 자기애를 형성하여 하나의 주체로,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

 

  엉뚱한 말일지라도 귀 기울여주는 것이, 와락 한번 안아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힘이 되는지를 모르는 척하는 조선족 사회의 미래는 두터운 장막으로 가려졌다. 아이들의 미래를 밝혀 주려는 움직임이 오히려 어둡게 만들고 있다. 적절한 자극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다음 세대의 부모가 되었을 때를 그려보는 것조차 겁난다. 코리안 드림을 이루고 귀향한 이들이 먼저 깨닫는다. 자녀와 멀어진 시간은 어떻게 하더라도 다시 메워질 수 없다는 것을. 자식과 부모 사이에 흐르는 강을 다시 좁힐 수는 없다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 버린 대가로.

- 김한길 수필집 <눈뜨면 없어라> (P. 340)

 

  이를 바꾸어 말하면, 조선족 부모는 자녀 성장에 치명적 결함을 주는 데 성공했다. 그때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 버린 대가로.

 

  가정이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린다. 그 틈에서 아이들도 흔들린다. 생생한 인터뷰와 현장감을 더해주는 사진 자료는 가없이 흔들리는 수많은 만주 아이들과 마주하게 한다. 엄마의 손길이 담뿍 담긴 음식에는 그 어떤 영양가 풍부한 음식도 주지 못하는 평온이 감춰져 있다. 내면을 살찌우는 음식과 멀어질수록 헛헛함을 게워내는 아이. 눈에 보이는 물질에만 집착하게 되어 버린 부모. 그들에게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실. 그런 까닭에 흔들림은 멈추지 않는다.

 

  사회 현상을 냉철히 바라보는 기록문학은 인간 행동의 오류를 자각케 한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위태로운 200만 조선족 사회의 일면을 보여 주며, 궁극적으로는 급속도로 성장한 경제 외형만큼 다지지 못한 의식이 불러온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조선족을 같은 동포가 아닌 이국인으로, 그것도 열등한 이국인으로 인식하며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대다수의 한국인. 이런 식으로 인격과 행복은 소유한 정도에 비례하다는 그릇된 가치관을 도습한 조선족은 사회의 주춧돌인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다. 한중수교 이후 와해되기 시작한 조선족 사회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한국에게도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근거다.

 

  물질에서 행복을 찾으면 끝이 없다. 김난도 교수가 말한 소비의 법칙을 인용하자면 어제보다 더 많이 소비하지 않으면, 타인보다 더 많이 소비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으니까. 오늘의 소소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자족할 줄 아는 현명함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 흔들리는 만주 아이들의 울음을 머지않은 한국 사회의 위기를 경보하는 사이렌으로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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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야, 잘 가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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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아틀란티스는 어떤 곳일까. 꿈꾼 적 있지만 밝힐 순 없다. 가라앉은 아틀란티스가 바다를 가르고 솟아오르는 일은 없을 테니까.

 

  경실은 미미가 되어야 자유롭다. 교내 손꼽히는 뚱뚱한 여중생이란 껍데기를 벗어던지려면 눈을 감아야 했다. 그래야 아름다울 미가 두 개나 있는 미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눈을 뜨면 정계 진출하려는 부패 공무원 아버지와 살가움이라고는 눈을 씻어도 찾을 수 없는 어머니가 있다. 하긴 미미처럼 늘씬하고 아름답게 생긴 정우처럼 생겼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거다. 정우는 경실의 배 다른 언니이자 이모의 딸이다. 경실 어머니는 언니의 남자에게 욕망을 품은 탓에 이렇게 못난 딸을 낳았다고 여기고 있다. 참, 아틀란티스는 정우와 같은 방을 쓰면서부터 경실의 가슴에 서서히 다가왔다. 정우의 짝사랑 타령이 뻔한 아틀란티스가 처음엔 시시했으나 나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매력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전설에만 존재하는 미지의 대륙을 믿으며 자기만의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다.

 

  비밀 독서클럽 친구들에게도 아틀란티스라는 멋진 세계를 선물하고 싶어 권하지만 현실이 버거운 친구들은 현실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용식은 끌려간 형의 이상이 그대로 아틀란티스가 되어 현 세상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어떻게든 개발을 앞세우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는 곧 빨갱이라고 여겼던 시기였으므로, 게다가 용식이 형의 안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위험을 느낀 경실은 용식의 글을 없애자고 제안했고, 용식과 친구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한동안 경찰서 신세를 진다. 그리고 경실은 자신이 독서클럽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시청 건설부 부국장인 아버지의 보호막을 기대했기 때문인 것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힌 자기의 시가 시집에서 일부 베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친구들이 눈치 채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스운 일은 경찰서에 끌려가는 열혈청년 용식이 형님과 부패한 공무원이자 미래의 대의원인 아버지의 독서목록이 같았다는 점. (P. 208)

 

  같은 시집을 보며 용식의 형과 경실의 아버지는 어떤 세계를 꿈꿨을까. 그들의 아틀란티스는 흡사한 색깔을 띠었으나 한쪽이 현실의 강을 거슬러 오르려고 버렸을 뿐이다. 아틀란티스를 버린, 대신 현실에서 아틀란티스를 찾으려는 아버진 만족스러울까.

 

  아틀란티스는 결국 찾을 수 없는 낙원일 뿐이지만 낙원을 꿈꿀 수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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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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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뜻하는 화양연화. 자기 삶의 화양연화를 묻는다면 슬기롭게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실은 그들도 동틀 무렵 밤새 움츠렸다 기지개켜는 햇살에 부시게 반짝이는 이슬 같은 청춘을 먼저 떠올릴 터. 싱긋 한 번 웃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찬란할 수 있고 설익은 사랑이 이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하루에도 수차례 두근거림과 벅참을 오가는 시간.

  실로 오랜만이지만 대번에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를 알아챈다. 언어가 아닌 음성이나 어조만으로 서로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근황을 묻는, 동시에 일상의 안온을 바라는 남녀의 통화. 과거 속의 그가 성큼 걸어오기 시작하면서 한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분명 존재했음을 확인한다. 과연 우리가 강물을 무사히 건너왔을까. 혹시 아직도 차가운 강물에 발목을 담그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깊은 여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헤어 나오려고 발을 내딛을수록 푹푹 빠지고 말아 결국은 가라앉고 마는 건 아닐까. 거꾸로 흘러간 시간은 차마 정리하지 못했던 청춘의 상흔과 대면하게 한다.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오르게 한다.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불안할 것 같은 스물을 갓 넘어선 그들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그들은 사각형이었다. 아니, 처음에 그들은 두 개의 선분이었다. 남매처럼 자란 윤과 단이, 마찬가지인 명서와 미루. 두 개의 점으로 이은 선분이 만나 상대의 점과 잇게 된다. 사각형 내각에 대각선이 그어지면서 점점 사각형은 좁아지지만 안정감을 갖게 되는데, 느닷없이 두 개의 점을 잃고 말았다. 졸지에 대각선밖에 남지 않은 윤과 명서는 본래의 맞은편에 위치해야 할 점의 상실로 원래의 점으로 되돌아갈밖에. 두 점이 지나간 자리에서 견딜 수 없는 시대의 우울과 무모한 기대가 빗어낸 생채기를 목도하며 아파할밖에. 아물 때까지 견디는 건 각자의 몫일 수밖에.

  유년의 확실한 증명이 되는 이들을 잃고 나서 과거의 상당 부분을 도난당했음을 깨닫게 되고, 이는 서툴게 품었던 연정까지 떠나보내게 만든다. 암울한 시대를 잊기 위해서는 오늘만 근심하는 어린 아이나 시간이란 퍼즐조각을 맞추다 폭삭 늙어버린 아이가 되어야 했던 시절. 이 세상을 짊어지는 크리스토프를 꿈꾸었으나 세상은커녕 서로에게도 크리스토프가 될 수 없었던 이들의 몸부림이 청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걸까.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사람에게 이제 한 발 내딛을 수 있을 것 같아. 위태로웠던 청춘이 벌써 저만치 갔음을 알리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폭포수처럼 떠나보내고 만 청춘에게 뒤늦은 작별 인사를 전하며 시간의 파문을 잔물결로 만든다. 화양연화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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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노트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5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이충훈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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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껏 해보지 못한 일 중 가장 후회되는 일은 가출이다. 다른 일은 뒤늦게나마 시도할 수 있지만, 물론 성년도 가출을 할 수 있는 노릇이지만 가출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주지 않는다면 여행이나 다를 바 없다. 그보다는 구실을 마련할 목적이 없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 학습 중심의 메커니즘에 대한 거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물결치는 자유에 대한 갈망! 그 얼마나 찬란한 구실인가. 하다못해 무라카미 류 소설 <69>의 켄처럼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하는 마라톤이 징글징글하여 가출할 수도 있을 텐데……. 현재의 나에겐 100미터 달리기라도 해보라고 재촉하는 이가 없다.




  나가면 고생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진리처럼 여겼던 과거의 내가 <회색 노트>를 진작 읽었더라면 최소한 시도는 하지 않았을까 싶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의 첫 시리즈인 <회색 노트>는 열네 개의 톱니가 있는 자크와 다니엘, 두개의 축으로 돌아간다. 자크가 볼록할 때 다니엘은 오목한 부분을 내밀며 굴러갔다. 누가 힘을 전달하는 축인지 헷갈리게 잘도 굴러갔다. 이를 증명하는 노트 한권, 서로가 서로의 깊숙한 공간까지 도달했음을 알려준다.




  그들의 작은 두 개의 톱니바퀴는 세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자크와 털컥털컥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아빠 티보. 그리고 티보와 연결된 거대한 로마 가톨릭 바퀴. 다니엘과 매끄럽게 돌아가지만 내구력이 의심되는 엄마 테레즈의 바퀴는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와 맞물려 돌아간다. 사이클에 결함이 없는 듯 보이나 자크와 다니엘의 우정을 초월한 관계를 넌지시 비치는 노트가 주목받으면서 굉음이 쏟아진다. 열네 살이 할 수 있을 법한 최고의 반항, 가출이다. 낯선 역과 낯선 길과 낯선 잠자리와 그보다 더 낯설어진 그들. 정신적 유대감이 현실의 친숙함으로 발돋움질하려는데 지극히 가까운 거리는 오히려 그들을 낯설게 만든다.




  성에 조숙해져버린 다니엘이 만들어낸 괴리감 때문만은 아니다. 숨김없이 주고받았던 노트는 잠시나마 그들의 맞물리는 자리에 기름칠을 해주었지만 나와 똑같았다고 믿었던 상대방의 형상은 처음부터 달랐음을 가출을 통해 확인한다.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불안과 낯선 곳에서 우연찮게 목도한 죽음과 귀가 후 밀려드는 서글픈 안도감은 두 소년을 한층 성장하게끔 한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가문과 자기의 명예에 해가 될까 저어하는 티보 씨와 오매불망 아들의 무사귀가를 바라는 테레즈 씨의 대비를 통해 한 사람을 이해하는 건 한 세상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크가 원한 건 스스로 자존감을 형성시킬 수 있는 가족의 이해다. 자크의 바람이 묵살되었음을 알고 마지막으로 다니엘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편지를 휘갈겨 쓰는 장면과 디졸브되는 집에 도착하기 전 형 앙트완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음을 감지한 자크의 표정. 참으로 안타깝다.




  과거의 가치를 현재에 이르게 하는, 우리가 고전이라 칭하는 책과 친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전에 대한 편견, 이를테면 지겹도록 지루한 내용, 뭔가 심오한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등은 고전의 오묘한 맛을 독자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감각적인 면을 선호하는 청소년에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청소년기에 읽지 못한다면 책장을 펼칠 확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청소년을 고전 독자층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도 <회색 노트>는 만족스럽다. 표지에 실린 부자는 부모와 헛도는 청소년간의 불협화음을 상징하고 있다. 얼핏 봤을 때 아버지 한 사람으로 보이는 의도는 기성세대의 위압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듯하다. 본문의 삽화도 독자에게 하여금 하나의 이미지로 남을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무엇보다 동시대에 놓고 작품을 재감상할 수 있는 책 뒤편은 어렵게만 다가오는 고전의 훌륭한 가이드 역할을 한다.




  삶의 비타민 같은 고전을 우리 청소년에게 읽히기 위한 시도, 나쁘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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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인형의 집 푸른숲 작은 나무 14
김향이 지음, 한호진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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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타계한 아동문학가 윤사섭의 <목각 인형>부터 말해야겠다.




  10페이지 남짓한 단편동화인 <목각인형>을 <광복 60년 동안 가장 빛나는 남북한 명작 동화 3>에서 만났다. 목각 인형을 만들어 파는 가난한 부부에게 늘그막 아들을 얻게 된다. 신의 선물을 고이 간직하고픈 부부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일조차 시키지 않는다.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우리네 부모와 크게 다르지 않던 부부.




  그들에게 불행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모가 하는 목각 만들기가 너무나 해보고 싶었던 아들은 몰래 기계 톱날을 조작하다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게 된다. 불행은 또 다른 불행을 낳아 곧 북에서 군인들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부모는 북으로 끌려간다. 졸지에 전쟁고아가 되어버린 아들, 어쩌면 좋은가.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기억까지 놓아버린다.




  야전병원에서 깨어난 아들은 미군의 슈샤인 보이가 되더니 어찌어찌하여 미국으로 입양된다. 오로지 아들을 만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 부부, 집을 찾았으나 아들은 온데간데없다. 아들을 그리는 마음이 폭포수 같았기에 이를 조금이나마 달래려고 아들 형상의 목각 인형을 만든다. 물론 왼손 새끼손가락을 만들지 않는다.




  이 새끼손가락 없는 인형 때문에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는 아들을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보며 떠올렸고 김향이의 <꿈꾸는 인형의 집>을 읽으면서도 스쳐갔다. 울보 존(해외 입양아)이 패대기치던 꼬마 존(인형)을 뒤에서 안으며 생모를 그리는 장면은 눈시울을 붉혔다.




  “양엄마가 싫은 건 아니야. 양엄마가 진짜로 좋아져서 친엄마를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나.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말로 양엄마를 아프게 했어. 나한데 잘해 주지 말라고. 그래서 부탁인데 엄마 곁에 남아 엄마를 위로해 줘. 넌 날 닮았잖아. 엄마가 나 대신 너라도 보면 덜 슬플 것 같아. 난 친엄마를 찾아갈 거야. 넌 여기 남아서 엄마를…… 지켜 줘. 부탁이야. (P.63)




  인형(人形)은 사람의 형태를 만든 물건이다. 역사가 기록되기 전부터 인형은 존재했다고 한다. 맨 처음 인형을 만든 사람은 누굴까? 어떤 마음으로 인형을 만들게 되었을까?




  사실 이런 의문은 부질없다. 한정된 지역에서만의 문화가 아닌 인류가 정착한 모든 곳에서의 공통분모이니까. 아이에게 변함없는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사랑의 대상을 나무로 조각할 수도, 어쩌면 평생 사람 냄새를 갈구하던 한 노파가 만들 수도 있다. 인형은 발명품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으로 만들어낸 애장품인 것이다.




  산다는 것은 상처 받기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사람의 형태인 이 책의 주인공 벌거숭이 인형도 드러내기 싶지 않은 상처를 받고 인형의 집에 도착했다. 절망뿐인 오늘이 인형을 사랑하는 할머니의 손길로, 주인의 상처를 고스란히 느꼈을 인형들의 이야기를 통해 희망으로 서서히 바뀐다. 앙증맞은 모습으로 재탄생한, 한때 벌거숭이였던 셜리의 모습! 상처받은 아이를 치유해 줄 것 같은 저 웃음!




  아이들도 상처를 받는다. 부모의 말 한마디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상처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독이 될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처를 받아야 빨간약 같은 치유를 받을 수 있지 않은가. 그래야 단련된 성장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빨간약 중 하나는 인형이 틀림없다. 또 하나는 인형들의 이야기 <꿈꾸는 인형의 집>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김향이 작가가 인형을 입양(수집)하며 치유하는 과정에서 상상한 <꿈꾸는 인형의 집>은 아이들의 생 앞에 대기중인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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