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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자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3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이광윤 옮김 / 동녘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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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세 번째 책을 이제야 펼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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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 두 번째 아이는 사라진다 문학동네 청소년 13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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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이 켜지고, 무대에 막이 오른다. (P. 16)

 

  수시로 화장실을 드나드는 남자아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따라가 딴청을 피우며 지켜봤더니 오랜 비행 끝에 깃을 고르는 새처럼 머리칼을 정돈하는 데 여념이 없다. 어디서 구했는지 유분을 흡수하는 하늘색 종이로 얼굴을 찍어내기도 한다. 한참 후에야 흡족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서는, 그 녀석 세계에선 첫 번째 아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아이 뒤통수에 지난날의 내 뒤통수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기 전 족히 삼십 분은 거울 앞에서 투덜거리곤 했다. 문을 열자마자 조명이 쏟아질 텐데, 그 조명을 고스란히 받으며 집을 나서야, 아니 무대에 올라야 하는데 머리 모양이 엉망이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모든 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내 모양새가 흐트러지지 않았나, 확인할 겸 주차된 자동차의 새까만 창에 얼굴을 들이밀다 운전석에 앉은 아저씨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친다. 이런, 제길!

  방미진 소설 <괴담> 안에 들어가자 수많은 상상 속의 청중이 소리 없이 사위를 메우더니, 연두가 학교 복도에 들어설 때 일제히 일어나 환호하기 시작했다. 상상 속의 청중은 청소년기에 겪게 되는 과장된 자의식에서 출발한, 타인이 집중적인 관심이 내게 쏟아지고 있다고 믿게 되는 자아중심적사고이다.

 

너도 똑같구나. 너도 결국은 두 번째 아이구나, 라는 동질감과 연민. (P. 236)

 

  누구나 각자의 세계에선 첫 번째 아이이다. 나만을 바라보는 상상 속의 청중을 즐겁게 해주려고 용을 쓰며 행복해하지만 청중은 눈치 채지도 못하는 실수나 혼자만의 염려가 생기면 괜찮은 곳이라 여겼던 세계가 조금씩 흔들린다. 내가 두 번째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첫 번째가 될 수 없다는 자괴감이 청소년의 의식을 잠식하면서부터 그 곳은 고통스러운 무대가 된다.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사진을 찍으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지고 만다는 괴담은 이러한 심리 과정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괴담은 트라이앵글 인물 구도로 현실이 된다. 자신을 첫 번째로 믿고 싶은 연두, 두 번째일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지연, 잊히는 게 두려워 죽음으로 기억을 선택한 연주로 꼭짓점을 이룬 트라이앵글. 남자 하나 여자 둘의 기묘한 애정 관계로 청중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지만 위태로웠던 균형은 이내 깨지고 말아 청명한 음을 잃은 치한·보영·미래의 트라이앵글. 이밖에도 끝없이 인정받기 위해, 혹은 인정받을 수 없어 좀처럼 불안을 떨쳐낼 수 없는 요한·지연·연지의, 자식을 좋은 배경이나 도구로 활용하려는 세파에 닳고 닳은 성혜·수경과 제자가 첫 번째가 될까봐 저주하는 경민의, 보이소프라노의 맑은 고음(아들)과 음울해지는 음색(딸)과 이유를 잃어버린 울음(엄마)으로 연주되는 삼중주의……. 삼각형 안에서 이들이 마침내 알아낸 진실은 모두가 첫 번째가 될 수 없다는 씁쓸한 자각. 그래서 중간에 끊긴 다리 같은 연못의 전망대는 이들의 해방구가 된 것이다.

 

“미 끼아마노 미미, 마 일 미오 노메 에 루치아(Mi chiamano Mimi, mail mio nome e Lucia).” (P. 52~53 / P. 142)

 

  이 소설의 중심인물을 꼽자면 단연 지연이다. 오래전부터 괴담으로 자기의 거짓 생을 구축한 아이의 핸드폰 벨 소리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중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 아리아의 첫 소절을 무려 두 번이나 소설에 실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미미는 파리에 올라온 시골 처녀다.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도 생활은 여전히 곤궁하다. 반반한 얼굴로 부르주아에게 몸을 파는 롤레트가 되고 마는데, 롤레트로 활동하는 가명이 미미다. 사랑하고 싶은 상대에게 본명을 밝히고서야 희망을 엿보는 루치아.

  루치아처럼 지연도 진솔해지고 싶지 않았을까. 꼬깃꼬깃 숨겨놓은 내면의 번민을 드러내면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 무대에 설 수 있음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열망으로 지연은 핸드폰 벨 소리를 선택하고 때때로 미미가 아닌 루치아가 되어 아리아를 부르지 않았을까. 지연의 상상 속의 청중은 꽤 오래전부터 박수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 안도현의 <연어> 중 “그러면 연어 떼가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인가요?”에서 인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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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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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산들바람 맑은 물결 위에 발을 적실 때

- 론타니, ‘아름다운 시냇물’


  강, 이라고 쓴다. 그러자 내 기억에 저장된 모든 강물 소리가 순식간에 거대한 강줄기를 만든다. 바닥을 애무하듯 흐르다 여울을 만나면 여울의 형태를 소리로 쓰다듬는. 그 맑은 소리를―때로는 세찬 소리를―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에는 묵묵히 흐르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저물녘 붉은 빛의 산란을 그대로 수면에 담아내어 넋을 잃게 하는.

  바람이 물결에 발 담그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그 청명함에 놀라 감았던 눈을 화들짝 뜨고 만다.


미소 띤 평온이 네 맘에 우러나 오만도 두려움도 사라지게 해

- 모차르트, ‘미소 띤 평온이’


  성석제의 장편소설 <위풍당당>은 강의 속성을 닮은 이야기이다. 아무리 급한 여울을 건너왔어도 이내 평온을 찾는.

  세파에 밀려 흐르고 흐르다 용소에 이른 사람들로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된다. 한때 인기리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여파로 지역 관광지가 될 뻔했으나 바람만이 드나드는 촬영세트장은 그들의 새로운 생활 무대가 된다. 출렁임을 멈추지 않던 과거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진다. 외관만 번지르르한 촬영세트장의 가식적인 공간에서 지난 삶이 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세상과의 단절이 주는 평온을 만끽한다.

  강마을에서의 생활은 지난 시간을 견뎌낸 보상일까. 부모의 비명횡사로 균열이 일기 시작한 ‘나’ 중심의 가족 체계는 조부의 충격사와 친족의 계략으로 영필의 황금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운명을 바꾸어버린다. 배고픔이라는 원초적인 본능을 뒤늦게 몸으로 깨달은 그는 결핍이 주는 활력과 절제가 주는 자족의 균형을 찾아가며 여생을 즐기려 한다. 지금까지의 삶이 환영에 지나지 않았음을 남편이 죽은 이후에야 깨달은 소희도, 남편의 성적 학대가 낳은 비극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려던 이령도 강마을에 이르러서야 오만과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위로하며 희망을 가져라. 새로운 사랑 또한 즐길 수 있으리

- 스카를라티, ‘위로하며 희망을 가져라’


  또 다른 강의 속성은 낮은 곳을 채우지 않고서는 차오를 수 없다는 점이다. 가끔은 폭우로 범람하며 먹장구름의 배경이 될 순 있어도 강물의 밑바닥에 허공은 있을 수 없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남자와 성폭행하는 양아버지 사이에서 갈등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새미와 그의 동생 준호. 가출하여 강마을에 정착한 남매는 마을을 위기로 몰고 갈 사건에 휩싸인다. 새미에게 음욕을 품었던 조직폭력배를 때려눕힌 것이다. 이 소설의 발단이다. 뒤탈이 저어된 영필은 남매를 잠시 떠나보내는 것이 현명한 판단임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폭의 보스인 정묵은 조직의 자존심과 기강을 세우기 위해 수륙 양쪽으로 강마을에 난입한다. 전개이다. 야산과 야산에서 자라는 식물의 결실과 그 결실을 먹고 사는 사람들과, 심지어 동식물이 소화기관을 거친 증거물까지 가세하여 승승장구하는데, 안타깝게도 도중에 어리숙한 준호가 뒷덜미를 잡히고 만다. 위기다. 준호를 살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마을 사람들의 가장격인 여산과 정묵의 예사롭지 않은 결전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애써 끌어모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절정. 그렇다면 결말은?


항상 너의 옆에 있어, 맑은 기쁨 네게 주리

- 아르디티, ‘입맞춤’


  강물은 한결같이 흐른다. 이것이 이 소설에서 발견한 마지막이자 보편적인 강의 속성이다.

  좀처럼 피딱지가 형성되지 않는 생채기에도 미끌미끌한 물이끼가 가득한 강바닥인 양 틈 없이 닿는 위무의 손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어느새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내 옆에 네가 있으므로 자신의 존재감을 찾게 된 사람들은 ‘나’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너’ 중심의 세계에 이른다. 그들의 이러한 흐름은 자연발생적인 가족에 가까워진다. 타인의 시선에 어떻게 비칠까 급급해 하는 동시에 자기의 안위와 이익 챙기기에 혈안인 조직과 대조를 이루면서 신생 가족은 햇살에 무방비로 노출된 강물처럼 반짝인다. 반짝인 채로, 여전히 흐른다.


하느님이 당신을 강하게, 더 강하게 만드네

- 엘가, ‘위풍당당행진곡’


  인생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희극이다. 희대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하나 둘 강마을에 모여든 사람들이 거쳐온 방을 바라보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길항할 수밖에 없는 측은한 인생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유일한 위안으로 여겨질 만큼. 그러나 멀찍이서 바라보면 그네들은 각자의 역경과 고통을 나름의 방법으로 이겨낸 인생이다.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시간도 흐름을 멈추진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울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고된 작업이다. 울음 대신 웃음으로 감동을 주는 것은 한층 고된 작업이다. 웃음으로, 그것도 해학에서 비롯된 건강한 웃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자는 울음은 아는 사람이다. 작가는 누구보다 채플린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소통과 이해로 사랑을 일궈나가는 강마을 사람들은 거짓된 공간에서, 머잖아 허물어질지 모를 터전에서 진실된 삶과 마주한다. 그러면서 강해진다. 이제 그 누구도 이들을 막을 수 없을 터. ‘덜컹대는 오토바이(세상) 위에서 자연스럽게 덜렁대지 않으면 자빠질 염려가 있다(P.97)’는 것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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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아이들
양석일 지음, 김응교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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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하는 아내가 병들어 곧 죽을 위기에 놓였다. 다행스럽게도, 한 약국에 아내를 치유할 수 있는 약을 판매하고 있다. 허나 불행하게도 그 약을 살 수 있는 거액이 없다. 약사는 돈을 받지 않고는 약을 줄 수 없다 한다. 이런 상황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콜버그의 도덕성 인지발달이론의 예문을 축약하면 이러하다.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겠으나, 약국에 잠입하여 약을 훔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당신은 전인습적 도덕성 2단계에 해당한다. 도덕성은 비교적 낮은 수준이나 세인의 비난은 그리 크지 않으리라 사료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행동이지 않은가.


  이와 흡사하지만 결정적으로 흡사하지 않은 얘기를 꺼내야겠다. 사랑하는 자식이 심장 기형이거나 얼마 살지 못할 중병으로 6개월 이내 심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 법이 허용하는 시간을 준수하자면 자식을 잃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어둠과 악수를 하면 살릴 길이 있다. 당신은, 기꺼이 어둠과 악수할 것인가?


  어린 몸에 맞는 심장을 얻기 위해선 어린 뇌사자가 있어야 한다. 구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자본의 논리는 이를 가능케 한다. 수요가 많다면 공급을 창출하기 마련. 의도적으로 뇌사자를 만들면 된다. 그렇다. 살아 있는 아이의 심장을 이식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눈치 채도 당신은, 어둠과 악수할 수 있는가?


  약이 사고 팔 수 있는 물품이란 점을 감안하면 어둠과 악수할 수 있는 자는 약을 훔친 자보다 도덕성이 높을 수 없고, 더욱이 비난을 피할 도리 없다. 사람은 사고 팔 수 있는 물품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갖춘 공통된 시각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가정이다. 실제가 아니다. 만약, 정말 당신에게 이런 시련이 닥친다면 손을 내밀지 않을까. 자식의 죽어가는 순간순간을 지켜보며 시간을 버텨낼 자신이 과연 있을까. 현대의학으로는 병명도 알아내지 못한 아들의 병이 나을 수 있다면, 국가의 독립을 지지했던 의사를 철회할 수 있다던 스페인 작가(정확하게는 카탈루냐 작가) 마리우스 세라의 심정은 보통 부모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한 아이의 희생 앞에 망설이다 돌아서는 경우도 있겠지만 애써 모른 척 하는 경우도 상당수 될 것이다.


  미야자키 아오이, 츠마부키 사토시 등의 유명 일본 배우가 출연한 영화의 원작, 양석일 소설 <어둠의 아이들>을 읽으며 선뜻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아마존의 눈물>에 등장하는 아마존 부족의 부모라면 자식의 죽음 또한 자연의 순응으로 받아들이며 상실을 감내하지 않을까.


  1989년 유엔 아동권리협약이 무색하게도 세계 곳곳에서 아동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다. 시에라리온 소년병이 회상하며 집필한 <집으로 가는 길>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 잔혹해질 수밖에 없는 수십만 명 소년병의 고통을 읽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뒤미처 정이현 소설 <너는 모른다>에서 자신의 장기를 빼앗기고 사자가 되어 더욱 작아진 몸으로 침대에 실려 나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아동노동은 그나마 경미한 편에 속한다고 해야 할 정도로 아직도 세계 아동의 인권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아동의 인신매매, 성학대가 자행되고 있는 태국의 어둠을 담아내고 있다. 영상을 통해 전해지는 열기가 일순 한기로 돌변되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불법 장기이식수술을 취재하다, 일본 아이에게 공급되는 심장이 살아 있는 태국 아이의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 신문기자 난부 히로유키와 우연찮게 난부와 엮이게 된 프리랜서 사진작가 요다 히로아키는 사진과 기사로 진실을 폭로하려 시도한다. 아시아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고 싶어 방콕까지 오게 된 사회복지사 오토와 케이코는 진실에 경악하지만 이내 사명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고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이를 구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다만 병원 입구에서 그 아이의 마지막 얼굴을 몰래 찍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현실. 살기 위해 병원으로 들어가는 일본 아이와 죽기 위해 같은 곳에 들어가는 태국 아이는 사진으로 인화되어 들리지 않는 말을 한다. 그 어떤 호소보다도 설득력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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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루만 더 아프고 싶다 문학동네 동시집 18
정연철 지음, 이우창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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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피카소는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년이 필요했으나 어린아이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평생이 걸렸다고 한다. 어린 아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만약 피카소가 동시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한층 빛나는 유산을 인류에게 남기지 않았을까. 손쉽게 아이의 마음이 될 수 있는 방법, 동시 읊기.


  정연철의 첫 동시집 <딱 하루만 더 아프고 싶다>는 성숙해가는 아이의 눈과 맞닥뜨리게 한다. 소리 내어 웃거나 울지 않도록, 다만 진지하게 화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도록 이끈다. 이야기가 다 끝나면 누군가 앉았던 의자에 궁둥이를 들이밀 때처럼 온기가 베어 나온다. 비록 슬픔에서 비롯된 정서라 해도.


할머니가 밥 주던 고양이

할머니 집 섬돌에서

할머니가 신던 털신 한 짝

홀쭉한 배 밑에 깔고

- ‘할머니와 고양이’ 부분


  할머니 손길에 길들여진 고양이는 당장의 먹이보다 온기를, 냄새를 갈구한다. 자기에게 정을 준 이의 체온과 냄새가 머문 털신을 깔고 배고픔을 참으며 기다린다. 그러나 고양이는 아직 모르고 있다. 할머니가 되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갔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모르는 척하는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이렇게 견디다 도둑고양이가 될지도. 가슴 한쪽에서 슬픔이 넘실거리는데 반대쪽에서 기쁨이 밀려온다. 서로를 사랑한 기억은 겨울 하늘을 한층 투명하게 하므로.


  이청준의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자꾸만 아기가 되어가는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담은 ‘애기 할머니’와 논일하다 한숨 돌릴 겸 논두렁에 앉을 때마다 죽은 할아버지의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지그시 바라보는 할머니가 인상적인 ‘허수아비’도,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손자의 간절함이 담긴 표제작 ‘딱 하루만 더 아프고 싶다’도 마찬가지다.


할머니 나 먹여 살리려면

일 나가야 하는데

딱 하루만 더

아프고 싶다

- ‘딱 하루만 더 아프고 싶다’ 부분


  밤낮 폐지를 주워 파는 할머니. 하루치 수입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그마저도 없으면 더욱 곤궁해진다는 것을 어린 손자는 뻔히 알고 있다. 손자 아프다고 곁을 떠나지 않는 할머니, 그 손길을 이틀도 아니고 하루만 더 아파서 더 느끼고 싶다는 아이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된다. 한없이 안타깝다가도 더없이 기쁘다. 할머니가 지금 눈앞에 있으므로.


  다양한 소재로 수십 편의 동시로 구성된 시집을 아우르는 시 한 편을 꼽는다면 망설임 없이 ‘팔짱’을 선택할 것이다. 이 시는 옆자리에 앉은 이의 어께에 기대어, 체온에 기대어 가는 게 삶이라 말하고 있다. 고인이 된 할머니와 고양이도 서로 기대며 간다. 아기가 되어가는 할머니와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가 서로 기대며 간다. 만날 수 없는 노부부지만 서로 기대며 간다. 죽음에 가까운 할머니와 할머니를 통해 죽음을 배울 아이가 기대며 간다. 뿐만 아니라 면식 없는 사람들과도 서로 기대며, 간다.


  자기 가슴을 안고 꼈던 팔짱이 풀리고 옆 사람과 팔짱을 낀다.


지하철 타자마자

따로따로 팔짱 끼고 앉는 사람들

쌀쌀한 날씨에

몸까지 바짝 움츠리더니

한 정거장 지나고

두 정거장 지나고……

어느새 옆 사람 따뜻한 몸에

팔짱 스르르 풀며

서로 몸을 기댄다

기대며 간다

- ‘팔짱’ 전문


  어린이가 되고 싶을 때마다 동시를 읽게 될 것 같다. 동시를 읽을 때마다 키가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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