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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뜻하는 화양연화. 자기 삶의 화양연화를 묻는다면 슬기롭게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실은 그들도 동틀 무렵 밤새 움츠렸다 기지개켜는 햇살에 부시게 반짝이는 이슬 같은 청춘을 먼저 떠올릴 터. 싱긋 한 번 웃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찬란할 수 있고 설익은 사랑이 이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하루에도 수차례 두근거림과 벅참을 오가는 시간.
실로 오랜만이지만 대번에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를 알아챈다. 언어가 아닌 음성이나 어조만으로 서로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근황을 묻는, 동시에 일상의 안온을 바라는 남녀의 통화. 과거 속의 그가 성큼 걸어오기 시작하면서 한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분명 존재했음을 확인한다. 과연 우리가 강물을 무사히 건너왔을까. 혹시 아직도 차가운 강물에 발목을 담그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깊은 여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헤어 나오려고 발을 내딛을수록 푹푹 빠지고 말아 결국은 가라앉고 마는 건 아닐까. 거꾸로 흘러간 시간은 차마 정리하지 못했던 청춘의 상흔과 대면하게 한다.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오르게 한다.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불안할 것 같은 스물을 갓 넘어선 그들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그들은 사각형이었다. 아니, 처음에 그들은 두 개의 선분이었다. 남매처럼 자란 윤과 단이, 마찬가지인 명서와 미루. 두 개의 점으로 이은 선분이 만나 상대의 점과 잇게 된다. 사각형 내각에 대각선이 그어지면서 점점 사각형은 좁아지지만 안정감을 갖게 되는데, 느닷없이 두 개의 점을 잃고 말았다. 졸지에 대각선밖에 남지 않은 윤과 명서는 본래의 맞은편에 위치해야 할 점의 상실로 원래의 점으로 되돌아갈밖에. 두 점이 지나간 자리에서 견딜 수 없는 시대의 우울과 무모한 기대가 빗어낸 생채기를 목도하며 아파할밖에. 아물 때까지 견디는 건 각자의 몫일 수밖에.
유년의 확실한 증명이 되는 이들을 잃고 나서 과거의 상당 부분을 도난당했음을 깨닫게 되고, 이는 서툴게 품었던 연정까지 떠나보내게 만든다. 암울한 시대를 잊기 위해서는 오늘만 근심하는 어린 아이나 시간이란 퍼즐조각을 맞추다 폭삭 늙어버린 아이가 되어야 했던 시절. 이 세상을 짊어지는 크리스토프를 꿈꾸었으나 세상은커녕 서로에게도 크리스토프가 될 수 없었던 이들의 몸부림이 청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걸까.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사람에게 이제 한 발 내딛을 수 있을 것 같아. 위태로웠던 청춘이 벌써 저만치 갔음을 알리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폭포수처럼 떠나보내고 만 청춘에게 뒤늦은 작별 인사를 전하며 시간의 파문을 잔물결로 만든다. 화양연화로 만든다.